빌1:12-30

 

도전:바울이 투옥 중에도 기뻐하며 살 수 있었던 이유와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상황:바울은 오직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다면 그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면 그것을 기뻐하였다. 또한 바울이 섬기는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한 길을 갔다. 바울의 이러한 가치관의 핵심기둥듣로 인해서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근래 83세 노모의 부상과 대수술과 입원 중 새로히 예측되는 대장암의 가능성 때문에 무척 우울하였다. 그리고 다른 몇가지 상황들은 내가 더욱 침울하게 만들고 있다. 내 삶과 사역이 무척 버겁게 느껴지고 있다.  이러한 때 내가 바울과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다면 그 가치관이 어떠한 변화를 주는 것일까? 평생 투철한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살아오시고 젊은 시절 버트란트 러셀의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고 불가지론자의 길을 택하며 오신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복음을 향해 마음을 여시고 신앙고백도 하시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좀 더 복음의 깊이와 능력을 좀 더 맛보게 하고 싶었으나 사실 기회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어쩌면 어머님의 현재 입원 상황은 어머니에게 복음 전파하기에 그리고 어머님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아주 좋은 기회인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가 침울해질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일까?  또한 우울해질 상황에서 오히려 이런 열린 기회로 인해 기뻐함으로써 특별히 어머님과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들이 볼 때에 그리스도를 더욱 존귀케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해야할 길이 아닐까?

 

변화:어머님의 입원 중 상황을 바울의 가치관적 관점에서 바라보자.

 

→: 아무리 바빠도 어머님께 좀 더 자주 가서 어머님을 위로해드리며 말씀도 나누고 기도도 많이 해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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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1:1-11

 

도전:빌립보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은 마게도냐 환상으로 인해 빌립보로 가게되어서 개척된 교회라는 점과 옥중에서 낳은 성도들이 있었다는 상황과 반드시 연결되어 생각되어야 한다. 

 

상황:빌립보교회는 그야말로 100%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진 교회이다. 원래 아시아 지역을 향하려던 모든 계획을 하나님께선 내려놓게 하셨고 바울의 선교팀을 마게도냐 환상을 통해 급전환시켜 빌립보로 가게 하셨다. 거기서 만나게된 기도하는 루디아와 그 일행등을 만나 교회가 이루어졌다. 바울은 그야말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느꼈을 것이고 이들을 만나게 하기 위해 그런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신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하늘미 맺어준 관계라는 생각이 깊었을 것이고 루디아와 같이 비지네스 우먼 및 함께하는 여성들은 바울에게 좀 더 감성적인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그 후 빌립보의 감옥에 갇히는 일, 거기서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면서 간수장과 가족의 개종과 성령의 기름부으시는 오순절적 사건 등 빌리보교회의 또 한 축을 이루게되는 사람들과는 특이한 인연으로(옥중에서 낳은 교회) 사역을 하게된 것이다. 이런 빌립보교회의 개척사를 보면 바울과 그 핵심멤버들의 관계는 아주 절친한 관계였을 것이다. 사실 이런 개척과정에 형성된 소중한 관계들! 바울은 이들을 무척 사랑하였고 이들을 위해 깊은 중보의 시간들을 가졌으며 이들에게 서신을 띠웠다.

 

변화:나의 중보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나의 관심과 사랑은 어느 정도인가?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를 어떻게 하며 어떤 A.S.를 하고 있는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좀 더 나의 중보리스트를 업데이트시키고 바울과 같은 마음과 태도, 그리고 구체적인 A.S.컨텐츠를 갖고 그들을 향해 수평적인 목회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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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6:21-27

 

도전: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고자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신비로 복음을 감춰두신 이유

 

상황: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다. 왜 하나님은 신비 속에 그렇게 하신 것일까? 또한 아주 장기간 감춰두고 계시다가 이젠 완전히 공개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관되게 비전의 비밀 메시지로 극소수의 사람들만 듣고 구원받게 하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27절 초두에서처럼 '지혜로우신 하나님'이란 말에서 그 답을 헤아려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의 지혜! 나도 누구도 미칠 수 없는 지혜이다. 그 지혜 속에 하나님께선 그렇게 하셨다. 조금이라도 헤아려보면 얼핏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두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성품과 방식에 맞게 구원하시기 위한 완벽한 수단이 그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지금의 세상에서도 복음은 불신자들에겐 거의 신비 속에 감춰진 보물이다. 이미 복음이 웬만한 곳이면 다 공개되었으나 다 그 복음을 알아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마치 열린 것과 같다. 이 신비의 계시가 내게 허락된 것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 복음은 정말 신비롭게 나에게 도달되었고 하나님은 내 눈의 베일을 거두시고 그 비밀을 알게 하셨다.  

 

변화:신비의 계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감사가 내게서 흘러넘쳐 나 또한 누군가 그 계시를 접해 구원에 이르게되는 자들이 나오게 하자.

 

→: 아뜰리쉬의 교사 중 불신자 등 내 주변에 불신자들에게 이 신비의 계시를 알려줄 수 있는 관계와 기회를 좀 더 적극적으로 맺자. 아뜰리쉬 교사들과 특별히 월 1회 스낵파티를 갖자! 

Posted by 고직한


롬14:13-23

 

도전:하나님의 나라-->(믿음으로)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과 사람에게 칭찬을 받음

 

상황: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섬기는 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자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자이다. 이런 내공이 있고 그 외적 결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삶 즉 경천애인적 특징이 나타나는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초대교회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행2:41-47에 보듯이 성령세례를 받아 이들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려 물질까지 서로 통용하는 코이노니아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이들의 모습을 보고 칭찬하였다.  이렇게 함에 있어 믿음이 중요한 통로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가? 나는 지금 일반 목회자들과는 달리 이른바 수평적인 목회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시공간적으로 나는 한 교회를 목회하는 타입의 사역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려운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근래 5-6년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기독 전문인들과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삶과 사역을 허락하셨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의 목회적 필요를 보게되었고 대가없이 그들을 향해 이른바 수평적인 목회를 느슨한 차원에서 해오게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젠 좀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섬겨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특별히 그들을 통해 전개될 다음 세대를 위한 멘토링을 꿈꾸면서. 그런데 이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나야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나라의 본질적인 특징 곧 성령 안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그 코이노니아의 본질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로부터 경천애인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와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사람들의 삶도 경천애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변화:하나님 나라 백성의 본질 또는 내공(성령 안의의,평강,희락)과 열매(하나님을 기쁘시게함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삶)가 내 삶과 사역의 특징이 되게 하자.

 

 →: 방금 출발한 목요 체인지매이커플랫폼의 청년멘티 15명을 위한 사역에 있어 이 하나님나라의 본질과 열매가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게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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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4:1-12

 

도전:하나님은 우리 삶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의 판단을 존중해주시는 중간지대의 삶을 허락하셨다.

 

상황:아디아포라(adiaphora)는 성경에 금하거나 명령하지 않는 교회의 의식적인 행사를 신자의 개인 신앙 양심에 맡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아닌 '아무래도 좋은 일들' 곧 아디아포라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디아포라를 인정 않고 아무래도 좋은 일들을 갖고 논쟁적으로 몰고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신다. 내가 선택한 것에 내가 책임을 지게끔 해주셨다. 그러면서도 내가 믿고 실천해야할 아주 중요한 일들도 내 자유의지를 존중해서 내가 판단하고 내가 책임지면 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명료하게 가르쳐주신 것들 말고 '아무래도 좋은 일들' 곧 아디아포라의 영역에 속하는 이슈들을 허락하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으로서 행동하는것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하는 관용적 자세이다. 물론 무엇이 성경의 근본적이고 무엇이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이냐는 약간 다를 수 있다. 나는 사도신경적 고백의 내용들이 근본적인 것들이라 본다. 사실상 그 외의 가르침들은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점에 있어 오늘의 말씀은 아주 명쾌하다. 무엇을 하든 주의 영광을 위해!

 

변화:초대교부와 존스톳이 말한 것처럼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에서는 일치를 비근본적인 것들에 있어서는 또는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들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인정하되 모든 것을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자.   

(아디아포라 가르침이 한국교회, 특히 근본주의적인 성향의 교회들에 필요하다. 반면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을 비근본주의 경향의 교회들은 명심해야 한다.)

 

→: 아디아포라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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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3:8-14

 

도전: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근거는 재림을 의식하고 우리가 처한 시기가 자다가 깰 때임을 아는 분별력에 있다.

 

상황:사실 하나님은 당시의 크리스찬들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거의 불가능한 한 말들만 하라고 골라서 하시는 것 같다. 솔직히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어떻게 사랑하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만약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내가 거듭난 것이 아니라면 엉토당토 않는 얘기다. 그러나 이른바 구원받아 내가 빛의 갑옷을 입은 것이 사실일진대, 내가 내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구원이 최종적 완성이 아니다. 칭의를 넘어서 성화와 영화의 구원이 더 있다. 그러니 칭의적 구원 이후의 삶이 구원의 완성이란 면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할 근거는 무엇이며 그 공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명시적으로 바울이 재림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바울은 시기를 언급하며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다하며 분명히 재림을 암시하는 말을 하고 있다. 사실상 임박한 재림에의 의식없이 구원 이후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른바 구원의 확신이라는 가르침이 내 정체성의 의식을 강화시켜주는 것은 아주 좋다. 그러나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면이 분명히 있다. 이에 찬 물을 퍼붓고 자다가 깰 때라고 말할 수 있는 '강박적 긴장감' 없이는 사실상 그 느슨한 삶을 벗어버릴 길이 없다. 나는 이 점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정말 믿는가? 그것도 긴박한 재림을 믿는가? 마치 반드시 다가 올 학기말 고사처럼 나는 느끼며 평소 준비하는가?

 

변화:나에겐 새벽 잠을 깨워줄 강력한 얼람클락이 필요하듯 임박한 재림에 대한 '강박적' 신앙이 반드시 필요하다. 구언 이후의 삶을 보다 더 완성해 가기 위해.

 

→: 재림과 종말론에 관한 성경연구를 하여 성경적인 종말의식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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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3:1-7

 

도전:불편한 명령-진노 때문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상황: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언론사의 기자와 논설위원 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거의 가정을 모르고 사셨고 마침내 정치하시다가 사상범으로(혁신계라는 낙인이 찍혀) 감옥에 가셨다. 무려 5년 정도 계셨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엔 조용한 곳에서 글쓰시고 사업하시느랴 역시 집을 돌보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나는 고등학교 들어가기까지 아버지가 살아 계셔도 사실상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살아 온 것이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부턴 어떤 일의 계기로 아버지와 아주 가깝게 보내는 기간이 적어도 내가 결혼하기까지는 이어졌지만.

그러다보니 난 윗 권위와 상대하는 법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내온 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갈등은 특별히 윗사람 남자들하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 나는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해서 뭔가 저항감이 있었고 반골적 기질이 작동했다. 이런 나에게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것은 사실상 꼴통이 되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인생 살아보면 역시 '상사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이 있다.그러나 이런 기술적 차원 보다는 양심에 입각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니 정말 마음이 불편해진다.

 

변화:내 마음에 불편이 있어도 위에 있는 권위를 존경하고  복종하자. 물론 하나님나라의 관점과 가치 속에서 짠 맛 잃은 소금처럼 순증주의자가 되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개혁적 변혁적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윗 권위를 존경하고 복종하는 자가 되자.

 

→: 윗 권위에 대한 신앙적이고 양심적인 복종

Posted by 고직한


롬12:14-21

 

도전: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의 근거와 동력이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진노

       하심에 맡기는 것으로 가능하고 충분한가?

 

상황:과연 하나님께서 내가 직접 한풀이를 하는 것보다 더 시원하게 더 완벽하게 한풀이를 해주실까? 솔직히 미덥지않다. 하나님의 나 대신 원수 갚는 것을 믿어도 되며 그렇기 때문에 나의 정당한 원수 갚기를 무작정위탁해도 될 것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내가 죄성으로 더 오바하여 한풀이를 할까봐 운동 경기의 심판관처럼 하실 필요성이 있는 것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원수 갚는 것 자체를 맡기라고 하시면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자, 봐라! 내가 너 대신 원수 갚는 것이 이만큼 완벽하하지 않아?"라고 하실 수 있는 것을 보여주셔야하지 않는가? 아직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또 나의 개인사에 있어 하나님의 공정하게 대신 원수 갚기에 대해서 의혹과 의구심이 많이 생기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컨대 똑같이 독재자이었으나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죄과는 박정희의 죄과보단 훨씬 크고, 문명사적인 기여에 있어 누구나 인정하듯이 박정희의 공적이 더 훌륭했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왜 김일성,김정일의 죽음은 그렇게 평탄한 죽음이고 박정희는 그렇게 끔찍한 말로를 맞았나? 그래, 그의 독재와 그로 인한 수많은 피해자들의 인권 착취와 억울한 죽음 등을 볼 때 박정희는 그렇게 죽어 싸다고 말하자. 그런데 6.25 등을 일으켰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기아로 수용소에서 죽게한 김일성,김정일은 어떻게 그렇게 곱게 죽어야 하나? 아--헷갈린다!  이런 면에서 사도바울의 가르침은 무엇이고 그 말씀 붙잡고 아주 억울하게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의 모습은 무엇인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일단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여기서 시편73편의 저자와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떠오른다.

                   시73편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마음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마음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육체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하박국2장

7.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8.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박국3장

12.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
13.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14.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15.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변화:시73편 저자가 '주의 성소에 나아가 ' 알게되었듯이 내가그저 불평하고 투덜거리지 말고 하나님의 전에 이 문제의식을 갖고 직접 나아가 하나님의 응답을 듣자. 시편저자는 그 악행하는 자들의 행위가 마치 꿈 속에 일처럼 깨고나면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듯이 그럴 것이라고 한다.분명히 내게 요청되는 것은 주님 자신과 더 친밀해져서 주님의 속 생각을 더 잘 알게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요 이슈를 하나님의 자신의 관점과 영원의 관점 및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는 통세적 관점에서 보고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하박국처럼 고백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박국3장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 오장육부가 흔들리고 뼈가 썩는 역사의식 속에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양극성 신앙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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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2:1-13

 

도전:1-2절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림과 뜻 분별의 명령은 3-13절의 공동체 안에서의 body life와 연결지어 생각해야 한다.

 

상황:이 본문에는 두 종류의 몸이 나온다. 하나는 1절의 '너희 몸'이라할 때의 성도 개개인의 몸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3-13절의 그리스도의 몸, 즉 기독공동체 또는 교회를 가르친다. 사실인즉 내 몸이란 것도 반드시 내가 속한 몸 곧 공동체 안에 달라 붙어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며 제대로 역동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내 몸을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려면,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잘 분별하려면 나는 공동체 안에서 지체의식을 갖고 다른 지체들과 연락과 상합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내 은사를 발휘하고 다른 지체들의 은사 발휘의 혜택을 입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면 그의 가르침을 잘 받아야 내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보다 더 잘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내게 주어진 소중한 관계들을 몸과 지체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자. 그저 언제 내가 이용할 목적의  소셜한 관계로 바라보고 대해서는 결코 안된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몸의 관계가 되도록 힘쓰자. 그것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young2080 식구들과 생생플랫폼,정감운동,윌버포스기도회,느티나무모임 멤버들과 깨끗한 마음속에서 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자.  그것이 내가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첩경이다 !

 

   

Posted by 고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