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질과 성격대로 큐티하기?

 

 

성격분석검사 도구 T-JTA

얼마 한국심리상담훈련원에서 하는 미국 최고의 성격분석검사 도구인 T-JTA(Taylor & Johnson Temperament Analysis)라는 검사의 상담자 과정을 이수했다. 1941 처음 개발된 이래 여러 번의 수정과 보완, 표준화 작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T-JTA 갈등요인 분석검사라고 불러도 만큼 개인, 커플, 혹은 부모자녀 간의 갈등 요인을 상담자로 하여금 눈에 파악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검사를 받는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의 시각을 보여주는, 다면적 검사 성격의 교차검사를 있는데, 이는 상담에 참여한 내담자의 대인관계인식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개인 생활, 사회생활, 결혼 관계, 자녀 교육, 가족 관계, 학업 추구, 직장 혹은 군부대에서의 적응 등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성격 특성을 파악하는 빠르고 편리한 측정도구로 인정받고 있다.


T-JTA 아홉 가지의 성격 특성과 반대 특성을 측정한다. 긴장과 침착, 우울과 쾌활, 활동과 은둔, 표현반응과 억압, 공감과 냉담, 주관성과 객관성, 지도력과 순응, 적개심과 관용 그리고 절제와 충동이다. 그러니까 검사를 제대로 받고 나면 자신의 기질과 성격의 장단점이 믿을 만한 통계 자료에 의해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나의 심리, 사회생활과 대인관계의 특징들이나 패턴들을 있다. 예를 들면, 긴장과 우울과 주관성이 아주 높게 나온 사람은 ‘걱정근심 패턴’을 보인다. 외에도 기피 패턴, 지배-적개심 패턴, 정서적 억압과 봉쇄 패턴, 심지어 자살 패턴 여러 가지 패턴들이 있다. 그래서 검사를 통해 누가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예측할 있고, 사전에 예방 조치를 취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사용한다면 탈영병이 소질이 있는 사람을 발견할 있고, 그때 군목이나 상사에게 배려하도록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유익이 검증됐다고 한다.

 

나를 알고 묵상하기

나는 T-JTA 검사와 결과를 가지고 상담하는 법을 배우면서 내가 큐티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기질과 성격대로 큐티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쳤다. 예를 들어, 적개심과 관용을 검사했을 적개심이 높게 나온 사람은 매사에 주로 비판적이고 경솔하며 배려심 없는 경향을 보이고, 또한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고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참지 못하고 비꼬거나 화를 내거나 논쟁적인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이런 기질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령의 조명과 인도도 구하지 않고 큐티한다면, 적개심을 강화하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기도도 그런 식으로 가능성이 아주 높아질 것이다. 균형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큐티한 말씀을 교묘하게 인용하고 포장해 다른 사람과 사회나 교회를 향한 적개심을 표출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뿐 아니라 자신도 알아야 큐티도 바르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눈이 특별히 어떤 면에서 굴곡이 있는지, 근시인지 원시인지, 어떤 특정한 색에 대한 색맹은 아닌지 알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귀납적으로 있지 않겠는가? 큐티를 풍성하게 하는 자신을 알아가는 공부도 도움이 되고, 이른바 문·사·철이라 불리는 인문학 지식도 도움이 된다.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은 성경 외엔 없다. 하지만 기질과 성격대로만 보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큐티공동체가 필요하다! 진정한 큐티맨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는 법이다

 

고직한 선교사 

Young2080 상임대표

 

 

 

Posted by 고직한


롬14:1-12

 

도전:하나님은 우리 삶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의 판단을 존중해주시는 중간지대의 삶을 허락하셨다.

 

상황:아디아포라(adiaphora)는 성경에 금하거나 명령하지 않는 교회의 의식적인 행사를 신자의 개인 신앙 양심에 맡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아닌 '아무래도 좋은 일들' 곧 아디아포라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디아포라를 인정 않고 아무래도 좋은 일들을 갖고 논쟁적으로 몰고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신다. 내가 선택한 것에 내가 책임을 지게끔 해주셨다. 그러면서도 내가 믿고 실천해야할 아주 중요한 일들도 내 자유의지를 존중해서 내가 판단하고 내가 책임지면 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명료하게 가르쳐주신 것들 말고 '아무래도 좋은 일들' 곧 아디아포라의 영역에 속하는 이슈들을 허락하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으로서 행동하는것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하는 관용적 자세이다. 물론 무엇이 성경의 근본적이고 무엇이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이냐는 약간 다를 수 있다. 나는 사도신경적 고백의 내용들이 근본적인 것들이라 본다. 사실상 그 외의 가르침들은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점에 있어 오늘의 말씀은 아주 명쾌하다. 무엇을 하든 주의 영광을 위해!

 

변화:초대교부와 존스톳이 말한 것처럼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에서는 일치를 비근본적인 것들에 있어서는 또는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들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인정하되 모든 것을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자.   

(아디아포라 가르침이 한국교회, 특히 근본주의적인 성향의 교회들에 필요하다. 반면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을 비근본주의 경향의 교회들은 명심해야 한다.)

 

→: 아디아포라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Posted by 고직한


롬13:8-14

 

도전: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근거는 재림을 의식하고 우리가 처한 시기가 자다가 깰 때임을 아는 분별력에 있다.

 

상황:사실 하나님은 당시의 크리스찬들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거의 불가능한 한 말들만 하라고 골라서 하시는 것 같다. 솔직히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어떻게 사랑하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만약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내가 거듭난 것이 아니라면 엉토당토 않는 얘기다. 그러나 이른바 구원받아 내가 빛의 갑옷을 입은 것이 사실일진대, 내가 내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구원이 최종적 완성이 아니다. 칭의를 넘어서 성화와 영화의 구원이 더 있다. 그러니 칭의적 구원 이후의 삶이 구원의 완성이란 면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할 근거는 무엇이며 그 공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명시적으로 바울이 재림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바울은 시기를 언급하며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다하며 분명히 재림을 암시하는 말을 하고 있다. 사실상 임박한 재림에의 의식없이 구원 이후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른바 구원의 확신이라는 가르침이 내 정체성의 의식을 강화시켜주는 것은 아주 좋다. 그러나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면이 분명히 있다. 이에 찬 물을 퍼붓고 자다가 깰 때라고 말할 수 있는 '강박적 긴장감' 없이는 사실상 그 느슨한 삶을 벗어버릴 길이 없다. 나는 이 점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정말 믿는가? 그것도 긴박한 재림을 믿는가? 마치 반드시 다가 올 학기말 고사처럼 나는 느끼며 평소 준비하는가?

 

변화:나에겐 새벽 잠을 깨워줄 강력한 얼람클락이 필요하듯 임박한 재림에 대한 '강박적' 신앙이 반드시 필요하다. 구언 이후의 삶을 보다 더 완성해 가기 위해.

 

→: 재림과 종말론에 관한 성경연구를 하여 성경적인 종말의식을 갖자.

 

 

 

Posted by 고직한




티는 하나님과의 데이트다. 큐티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라고 할 때 큐티를 데이트에 비유하는 것은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오늘은 하나님과 데이트하고 싶지 않은데라는 느낌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말은 요즈음 큐티 본문이 별로 와 닿지 않아. 이런 드라이한 본문으로 꼭 큐티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문제제기는 상당히 많이 있다.


친구 이전에 주인이시다

큐티를 하나님과의 데이트로 규정하는 것은 틀린 게 아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관계를 신랑신부의 관계로 보는 것은 아주 성경적이다. 이 사랑의 관계 속에 데이트가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친구 관계로 초대되었다는 것 또한 아주 성경적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 여겨졌다(2:23, 41:8). 모세는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다(34:10).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초청하셨다(15:15).

그러나 이 큐티론의 최대 문제점은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를 수평적 차원에만 국한시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먼저 확립되어야 할 수직적 관계의 요소가 결여된 것이다. 수직적 관계에 대한 기본자세가 전제되지 않는 수평성은 우리의 경건생활의 모든 시도를 종종 인본주의적 오류와 실용주의적인 함정에 빠뜨리곤 한다. 그래서 기도도 큐티도 내가 싫으면 그만일 수 있는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데 데이트를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요즘 같이 수평주의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이 말에 저항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곧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과 왕권(Kingship)과 머리되심(Headship)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의 모든 주권과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부인(self-denial)을 해야 하며, 종됨(servanhood)의 자세를 철저히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말해주는 에스겔 1:10(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과 이와 상응하는 요한계시록 4:7(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을 보면 우리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과 소(송아지)의 이미지도 있으나 무서움과 두려움을 주는 사자와 독수리의 이미지도 있다. 우리가 큐티를 할 때엔 하나님의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떠올려야지 편식하듯이 자신에게 필요한 이미지만 떠올려서는 안 된다.


교제 이전에 알현부터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평적인 교제 이전에 수직적인 충성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귐의 장으로 수평적인 초대장을 보내시기 전에 우리에게 왕으로서 수직적인 소환장을 보내신다. 우리에게 수평적인 데이트 이전에 수직적인 알현을 요청하시는 것이다. 충성심으로 왕께 알현하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큐티를 하느냐 안 하느냐는 나의 내적 상태와 무관하게 마땅히 표현해야 할 나의 경외감과 충성과 순종의 반응인 것이다. 하나님을 연인으로 여기는 마음도 필요하겠으나 먼저 하나님을 알현해 그의 얼굴빛을 구하는 자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빛을 보는 것 자체가 영광이고 특권이다. 그 빛을 보면 누구든 자신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죄덩어리인지를 느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절실해진다. 이어서 죄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경험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긍휼에 대한 감동이 일어난다. 비로소 하나님과의 데이트가 내 위치와 맞지 않는, 얼마나 파격적인 초대였는지 느끼며 하나님과 친밀감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큐티의 바른 순서다. 하나님과의 데이트 이전에 하나님께 알현함이 먼저요 대전제임을 반드시 기억하라.


고직한 선교사

Young2080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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