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4:10-23

 

도전:바울 스타일의 fund raising.

 

상황:바울은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선교사역에 물질로 돕는 첫 교회인 것을 밝히며 감사해하고 있다. 빌립보교회는 두 번 바울을 물질적으로 돕고 이제 또 하고자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와의 친밀성과 투명성을 기초로 분명히 밝힌다. 자신은 선물을 밝히는 자가 아님을, 그리고 자신은 비천과 풍부, 배고픔과 배부름에 처할 줄 아는 자족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바울은 재정을 많이 필요로 하는 선교사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괴로움’의 때도 있었던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빌립보교회의 헌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임을 말하며 바울은 격려한다. 더나아가 빌립보교회의 경제생활에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축복하실 것을 예언적으로 선포한다.

빌립보서는 어떤 면에서 바울의 fund raising letter이기도 하다. 바울에게서 가장 배워야할 면은 누가보아도 선교 빙자하여서 물질을 구하는 자가 아니고 어떤 가난과 괴로움도 믿음 가운데 이겨내고 오히려 내적으론 은혜가 풍성하여서 사역대상들에게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빌립보교회가 투명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young2080사역을 한 이후 지금까지 12년 간 감사하게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며 30여명의 사역자들을 세워주셨다. 근래들어 역시 세계경제가 안 좋은 여파가 한국에도 미치고 그것이 young2080의 사역에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유사 이래 아주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명심하자. fund raising이 물질과 선물을 구하는 저급한 사역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와 우리 사역자들이 가난과 풍부 등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것을 더욱 생활화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말 때문이 아니라 저들을 위한 우리의 진실한 기도가 응답이 되어 fund raising에 동참하는 교회나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 속에 풍성하심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게 이른바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의 제공인 것을 아주 절실히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변화:바울식 가치관과 삶을 기반으로하는 다음 세대를 위한 fund raiser가 되자!

 

→ young2080과 mentoring korea를 위한 fund raising에 있어 하나님께서 내게 깨끗한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내가 진정한 복의 통로가 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하자!

 

Posted by 고직한

빌4:1-9

 

도전:"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라고 바울처럼 나는 자신있게 나의 사역 대상에게 말할 수 있나?

 

상황:옥중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빌립보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권면하는 바울은 자신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담대하게 말한다. 그는 빌립보교회를 개척하고 양육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삶과 가르침을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친밀성과 투명성있는 관계를 맺었다.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의 담임목사들은 얼마나 바울처럼 자신의 성도들에게 담대히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면 과연 성도들은 지도자의 말에 감동과 도전을 받고 그대로 행할까? 오늘날처럼 목회자와 사역대상 사이에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사역을 하면 바울과 같이 결코 말할 수 없다. 본 바가 없는데 들은 것만 갖고 완벽히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떤가? 나도 나의 동료들 및 사역대상들과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며 지내왔다. 나의 사역적 부담을 가족들에게까지 안기기를 원치 않아 그랬을 수도 있고 여건이 안되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역환경 속에선 바울식 사역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나의 사역대상과 친밀성과 투명성을 느낄 수 있는 사역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

 

변화:적당한 거리두기를 깨는 사역 환경을 만들자. 그러기 위해 더 이상의 사역 대상을 만들지말고 이미 맺어진 사역대상과의 관계를 좀 더 깊이 하자. 가능한 한 나주 만나 삶을 나누고 관계가 돈독해지는 사이를 만들자

 

→: 가족 플러스 나의 코아 12인과 점진적인 동심원적 관계도를 만들고 코아 12인과는 정말 친밀성과 투명성이 나타나는 여건을 적극적으로 만들자. 

Posted by 고직한

빌3:10-21

 

도전:오늘과 같은 다원주의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란?

 

상황: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할 정도의 대상이 되는 빌립보 교인들 중에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거듭난 듯 해도 그들의 신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아니라 오직 배이다. 이런 자들의 포장술은 뛰어나서 이른바 음식과 관련한 정결법으로 자신들의 진정한 관심사를 포장하지만 오직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율법을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어떤 율법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선 상대화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배에 들어가는 음식의 정결함을 말하는 정결법이라해도. 마치 그 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과 능력에 저해가 된다면 그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바울에 의해 변화받아 형성된 빌립보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오늘날 훨씬 혼탁한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그 실현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느 사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세사리가 되고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도 이루어지는 '공의와 평화'를 추구한 것은 아닌가? 다원주의적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신앙과 세상의 이원론적인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을 하늘나라적인 관점에서 변화시키고자할 때 종종 세상의 프레임에 갇혀서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지경에 빠질 가능성이 상존한다. 존스톳이 말하는대로 배고픈 사람에게는 복음을 들을 귀가 없다. 그러므로 그 귀를 열어주는 빵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빵의 문제가 해결된다해서 복음을 들을 귀가 열리는 것은 아닐 수도 있잖은가? 그리고 귀가 열려도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제공않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닌가? 문제는 빵을 주어도 인간의 문제는 '오직 빵'이라고 믿고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은 필요하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기도 하셨고 병들을 치료도 해주셨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에 대해 눈이 열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그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변화: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된 하나님나라의 프레임 속에서 이 땅의 체인지메이커가 되자!

 

→: 이번 상해 코스타의 첫날 저녁 집회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명히 가르치자. wounded healer이든 change maker이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되고 동력이 되고 목표가 되는 삶을 보여야 한다. 

Posted by 고직한

빌3:1-9

 

도전:"예수님 외에는 모든 것이 다 배설물이야!"라는 바울의 극단주의

 

상황:살아가는데 유익한 소셜 스테이터스와 스펙들을 바울은 해가 되고 심지어는 배설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바울의 극단주의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런 것들을 덜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나? 또는 2차적인 것들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나? 해가 되는 것이니 배설물이니라고 말하는 것은 좀 극단이 아닌가? 아무리 예수님을 자랑하려해도 이 세상에선 뭐 돈도 좀 있고 학위도 제대로 갖추었고 뭐 좀 '뽀다구'나는 것이 있어야 예수님을 자랑해도 먹히는 것이 아닌가? 찌질이가 되어서 예수님을 자랑하려면 누가 귀를 기울일까? 바울이 말하는 것은 찌질이가 되어야한다는 말인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자랑하기 위해서 바울은 극단주의자가 되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스테이터스와 스펙들을 해가 되는 것으로 또는 배설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심리 속에는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기는 사실상 우상숭배의 심리가 스며있기 때문에 그렇다. 또는  마치 침몰하는 배에선 구명튜브 외엔 다른 짐들이 다 해가 되므로 내어던져야 하듯이

예수님만 신뢰해야하는 상황에서는 소위 유익했던 것들이 나를 해치는 짐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혈육적 관계를 심지어 미워해야한다고 하시는 급진적인 말씀과 맥이 통한다. 예수님을 쫓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삶에는 극단주의와 급진주의가 진리이다. 균형이고 상식이고 하는 것은 다 거짓이다. 

오래 전 문애란대표가 이른바 '영빨'이 충만한 초롱초롱한 눈 빛과 목소리로 "다 똥이에요!"라는 말을 할 때 그 분의 직설적인 표현에 감동과 함께 놀랐었다. 광고계의 신화적이었던 그가, 여성카피라이터 1호니 깐느광고제에서 은상수상자이니하는 찬란한 스펙을 갖고 있는 그가 그 말을 할 때는 마치 그런 것들은 "다 똥이에요!"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 예수님을 알려면 그런 것들은 해가되고 오물과 같으므로 다 치워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에 조금이라도 연연하면 예수님을 향한 내 마음이 흐트러질 뿐이다. 아주 값진 향수는 내 몸에 모든 것들을 씻어내었을 때 그 가치가 발한다. 가장 값진 보석은 그 주변을 심플하게 치워버려야 훨씬 빛난다. 다른 보조수단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문대표의 또 하나의 명 카피, "다 똥이에요!"는 바울과 예수님의 극단주의와 급진주의와 통한다. 이른바 강남 스타일이 아닌 '예수 스타일'이다!

 

변화:바울의 극단주의를 내 가치와 태도로 채택하자.

 

→: 이번 추석 중 섬기게될 상해코스타의 저녁 집회 중 유학생들에게 바로 이 바울의 극단주의를 믿음으로 채택하도록 도전하자.

 

 

Posted by 고직한

빌2:19-30

 

도전:대부분의 크리스찬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고 자기 일을 구하는 것을 바울은 지적한다.

 

상황:이미 바울의 시대에도 적잖은 크리스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보다는 자기 일을 구하였다. 그러할진대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할까? 사람의 심중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의 심령을 보신다면 뭐라 판정을 내리실까? 바울은 디모데가 바로 자기 일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모델로 말하고 있다. 디모데는 빌립보교회와 뜻을 같이하여 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도 인정하듯이 디모데는 연단을 받았으며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깥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에바브로디도를 언급한다. 바울에 의해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로 불려진 자이었다. 자기가 병들어 죽게된 상황에서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빌립보교회를 염려하였고 수고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어떠한가? 나는 외견상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며 온 자임은 분명하다. 이른바 사역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진정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처럼 포장된 그러나 실상은 '나의 일'을 구하여 온 것은 아닌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나를 비교하면 나는 어떤가?

사실 나는 나름대로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살아오긴 했다. 심지어는 나의 건강과 나의 가정도 희생한 채로. 그러나 그 내면의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나? 부끄럽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가 순도 100%로 나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면 살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내 힘과 의지로써 하려면 뭔가 내 냄새가 나타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변화: 그러나 내가 오직 성령에 의해 움직인다면 나는 성령의 일을 구할 것이다. 전적으로 성령에 사로잡히고 싶다. 그래서 내가 내 일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진정으로 구하며 살고 싶다.

 

→: 아뜰리쉬 다락방에서 아내와 함께 더욱 성령을 사모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좀 더 갖고 빈도수를 더 높이자. 최대한 기도를 중심화하고 다른 일들을 비중심화시키는 노력을 더 기울이자!

Posted by 고직한

빌2:12-18

 

도전:나의 구원의 확신은 바울이 말하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상황:칭의적 의미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성화적 의미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도상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내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하여서 마치 더 이상 성화될 필요성이 없이 온전함에 도달한 것 같이 확신한다면 이것은 오만이고 근거가 없는 억측(presumption)이다. 온전한 의미의 구원에 이루기 위해서는 두렵고 떨림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겸손할 것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고 어찌하면 온전함에 이를지 하나님 앞에 마치 시험준비하는 자가 불을지말지를 노심초사 걱정하며 준비하는 것같이 하라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기독교의 진리의 패라독스를 본다. 칭의적 의미의 구원에 대해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진대 아주 강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나, 성화적 의미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구원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또는 자신이 도달한 지점에 대해서 끊임없이 불만족스러워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두렵고 떨림의 자세가 나홀로 노력하고 투쟁하는 외로운 싸움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내 안에는 '행하시는 이'(God who works in me)가 계시고 그 분은 내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14절).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흠이 없고 순전하여'질 때까지이다.그것도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그렇게 입증이 되어야하는 것이다(15절). 그럼으로써 나는 패역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16절).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내게 기대하는 성화적 구원이란 온상에서의 나약한 성장이 아니라 비바람 몰아치고 온갖 더위와 추위의 역경이 있는 세상 속에서의 강인한 구원을 말한다. 경쟁이 치열하고 내가 온전함을 추구하면 죽음의 위협이 있는 그런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빛이 되길 원하신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많은 내공이 필요할까?! 

 

변화:나야말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을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더욱 치열하게 살자.

 

→: 성화적 의미의 성장과 구원을 위해 더 많은 내공을 쌓고자 하는 나의 결단이 더 강화될 수 있는 생태계 속에 나를 놓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의 내가 관계하고 있는 소공동체들이다. 이 소공동체에 임하는 자세를 좀 더 새롭게 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그리고 더욱 성실하게 하자.  

Posted by 고직한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도전:항상 기도할 때 특별히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이유는 무엇일까?

 

상황:무시로 기도하라든가, 항상 기도하라든가, 쉬지말고 기도하라든가하는 명령은 기도의 때와 관련한 말씀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할 때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며 기도의 컨텐츠와 관련한 것을 말한다. 많고 많은 기도의 제목들 중 많은 성도들을 기억하며 기도해야할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그 성도들 하나하나를 바로 나를 소중하게 대하듯이 대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나도 필요를 많이 갖고 있고 보호와 가이드를 필요로 한다면 그리고 그런 필요들이 기도 가운데 공급해주길 원하시는 것이라면 다른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리고 성도 하나하나가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 지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지체 간의 상호 기도는 마치 몸 속에 세포마다 연결되어 영양분이 상호 소통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천애인이란 하나님의 대계명에 비추어 하나님께서 성도들 사이에 가장 이루어져야할 '경천'의 열매가 그것이고 '애인'의 구체적인 모습이 서로를 위하여 중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서로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부모가 여러 자녀들이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며 서로를 아끼는 모습을 볼 때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선 우리가 여러 성도들을 윟여 기도하는 모습에 기쁨을 누리시는 것이다.  

 

변화:나와 연결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나와 연결된 지체들이다. 내가 그들과의 지체의을 가장 잘 나타내는 모습은 내가 그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기도하는 것이다. 나의 소중한 관계들 속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기도, 보다 더 열심히 하자.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항상 기도하자.

 

→: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Daphne Roberts선교사가 떠오른다. 위하여 기도하고 연락을 해보자.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새롭게 만들어 보자. 그리고 항상 기도할 때 잊지않고 기도할 수 있는 시스템(아이폰 메모 사용)을 만들도록 하자.

Posted by 고직한

빌2:1-11

 

도전:예수 공동체의 특성과 그 근본정신

 

상황:빌립보교회에는 약간의 분열이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이러한 조짐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의 특성은 결국 한마디로 경천애인인 것을 말한다. 바울식 표현으론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그 마음을 품은 자들은 한 마음 즉 같은 마음, 같은 사랑,같은 뜻을 품고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김과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봄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한국교회는 입술로는 예수,예수해도 사실상 예수의 마음을 품은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 엄청난 분열과 반목, 불신과 정죄는 예수의 마음과는 완전 상극의 모습이다. 도대체 어떻게해야 되는 것일지? 어떻게해야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끔 할 수 있을지? 소위 말하는 교단 지도부니 교계지도자니 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나 이른바 괜찮다고 하는 담임목사들의 연합의 모습이나 대부분이 결코 예수의 마음을 품고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양상의 핵심은 악화가 양화를구축하는 일이다. 또한 그렇게 되는 근본적 이유는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 교계의 지도자들이 되지 않고(이들은 자기 목회에만 너무 바쁘고-- 자기 일만 돌아보고 남의 일은 돌아보지 않기 때문) 소위 교계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들은 자기 일은 돌아보지 않고 한가한 사람들로 이른바 현장에서 예수의 마음을 품은 지도자로 검증이 안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렇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상층부로 갈 수록 무자격자들로 한국교회와 교계의 대표성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아주높다. 이것이 한기총의 본질적인 모습이고  교단 노회나 총회의 모습이다. 즉 일해야할 사람은 안하고 있고, 하지말아야할 사람은 설쳐대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현재로선 진실한 중보기도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예수원의 벤토리신부가 고민하는 한국교회의 진정한 하나됨도 바로 이런 고민이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 중보기도에 힘쓴다.  

 

변화:나 자신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내가 책임있는 공동체에서만이라도 그리고 다음 세대를 일으키는 그 일 가운데에서만이라도 바로 이 경천애인의 본질과 특징이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힘쓰자!

 

→: 그렇다! young2080리더쉽과 r&d,e팀 안에서, 멘토링코리아 준비팀,느티나무, 정감운동 팀, 클래팜기도회 안에서 내가 먼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실천하며 중보기도하자.

Posted by 고직한


빌1:12-30

 

도전:바울이 투옥 중에도 기뻐하며 살 수 있었던 이유와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상황:바울은 오직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다면 그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면 그것을 기뻐하였다. 또한 바울이 섬기는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한 길을 갔다. 바울의 이러한 가치관의 핵심기둥듣로 인해서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근래 83세 노모의 부상과 대수술과 입원 중 새로히 예측되는 대장암의 가능성 때문에 무척 우울하였다. 그리고 다른 몇가지 상황들은 내가 더욱 침울하게 만들고 있다. 내 삶과 사역이 무척 버겁게 느껴지고 있다.  이러한 때 내가 바울과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다면 그 가치관이 어떠한 변화를 주는 것일까? 평생 투철한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살아오시고 젊은 시절 버트란트 러셀의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고 불가지론자의 길을 택하며 오신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복음을 향해 마음을 여시고 신앙고백도 하시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좀 더 복음의 깊이와 능력을 좀 더 맛보게 하고 싶었으나 사실 기회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어쩌면 어머님의 현재 입원 상황은 어머니에게 복음 전파하기에 그리고 어머님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아주 좋은 기회인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가 침울해질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일까?  또한 우울해질 상황에서 오히려 이런 열린 기회로 인해 기뻐함으로써 특별히 어머님과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들이 볼 때에 그리스도를 더욱 존귀케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해야할 길이 아닐까?

 

변화:어머님의 입원 중 상황을 바울의 가치관적 관점에서 바라보자.

 

→: 아무리 바빠도 어머님께 좀 더 자주 가서 어머님을 위로해드리며 말씀도 나누고 기도도 많이 해드리자.

 

Posted by 고직한


빌1:1-11

 

도전:빌립보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은 마게도냐 환상으로 인해 빌립보로 가게되어서 개척된 교회라는 점과 옥중에서 낳은 성도들이 있었다는 상황과 반드시 연결되어 생각되어야 한다. 

 

상황:빌립보교회는 그야말로 100%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진 교회이다. 원래 아시아 지역을 향하려던 모든 계획을 하나님께선 내려놓게 하셨고 바울의 선교팀을 마게도냐 환상을 통해 급전환시켜 빌립보로 가게 하셨다. 거기서 만나게된 기도하는 루디아와 그 일행등을 만나 교회가 이루어졌다. 바울은 그야말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느꼈을 것이고 이들을 만나게 하기 위해 그런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신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하늘미 맺어준 관계라는 생각이 깊었을 것이고 루디아와 같이 비지네스 우먼 및 함께하는 여성들은 바울에게 좀 더 감성적인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그 후 빌립보의 감옥에 갇히는 일, 거기서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면서 간수장과 가족의 개종과 성령의 기름부으시는 오순절적 사건 등 빌리보교회의 또 한 축을 이루게되는 사람들과는 특이한 인연으로(옥중에서 낳은 교회) 사역을 하게된 것이다. 이런 빌립보교회의 개척사를 보면 바울과 그 핵심멤버들의 관계는 아주 절친한 관계였을 것이다. 사실 이런 개척과정에 형성된 소중한 관계들! 바울은 이들을 무척 사랑하였고 이들을 위해 깊은 중보의 시간들을 가졌으며 이들에게 서신을 띠웠다.

 

변화:나의 중보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나의 관심과 사랑은 어느 정도인가?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를 어떻게 하며 어떤 A.S.를 하고 있는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좀 더 나의 중보리스트를 업데이트시키고 바울과 같은 마음과 태도, 그리고 구체적인 A.S.컨텐츠를 갖고 그들을 향해 수평적인 목회를 하자.  

Posted by 고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