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는 하나님과의 데이트다. 큐티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라고 할 때 큐티를 데이트에 비유하는 것은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오늘은 하나님과 데이트하고 싶지 않은데라는 느낌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말은 요즈음 큐티 본문이 별로 와 닿지 않아. 이런 드라이한 본문으로 꼭 큐티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문제제기는 상당히 많이 있다.


친구 이전에 주인이시다

큐티를 하나님과의 데이트로 규정하는 것은 틀린 게 아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관계를 신랑신부의 관계로 보는 것은 아주 성경적이다. 이 사랑의 관계 속에 데이트가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친구 관계로 초대되었다는 것 또한 아주 성경적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 여겨졌다(2:23, 41:8). 모세는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다(34:10).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초청하셨다(15:15).

그러나 이 큐티론의 최대 문제점은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를 수평적 차원에만 국한시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먼저 확립되어야 할 수직적 관계의 요소가 결여된 것이다. 수직적 관계에 대한 기본자세가 전제되지 않는 수평성은 우리의 경건생활의 모든 시도를 종종 인본주의적 오류와 실용주의적인 함정에 빠뜨리곤 한다. 그래서 기도도 큐티도 내가 싫으면 그만일 수 있는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데 데이트를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요즘 같이 수평주의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이 말에 저항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곧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과 왕권(Kingship)과 머리되심(Headship)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의 모든 주권과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부인(self-denial)을 해야 하며, 종됨(servanhood)의 자세를 철저히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말해주는 에스겔 1:10(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과 이와 상응하는 요한계시록 4:7(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을 보면 우리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과 소(송아지)의 이미지도 있으나 무서움과 두려움을 주는 사자와 독수리의 이미지도 있다. 우리가 큐티를 할 때엔 하나님의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떠올려야지 편식하듯이 자신에게 필요한 이미지만 떠올려서는 안 된다.


교제 이전에 알현부터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평적인 교제 이전에 수직적인 충성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귐의 장으로 수평적인 초대장을 보내시기 전에 우리에게 왕으로서 수직적인 소환장을 보내신다. 우리에게 수평적인 데이트 이전에 수직적인 알현을 요청하시는 것이다. 충성심으로 왕께 알현하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큐티를 하느냐 안 하느냐는 나의 내적 상태와 무관하게 마땅히 표현해야 할 나의 경외감과 충성과 순종의 반응인 것이다. 하나님을 연인으로 여기는 마음도 필요하겠으나 먼저 하나님을 알현해 그의 얼굴빛을 구하는 자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빛을 보는 것 자체가 영광이고 특권이다. 그 빛을 보면 누구든 자신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죄덩어리인지를 느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절실해진다. 이어서 죄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경험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긍휼에 대한 감동이 일어난다. 비로소 하나님과의 데이트가 내 위치와 맞지 않는, 얼마나 파격적인 초대였는지 느끼며 하나님과 친밀감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큐티의 바른 순서다. 하나님과의 데이트 이전에 하나님께 알현함이 먼저요 대전제임을 반드시 기억하라.


고직한 선교사

Young2080 상임대표 



Posted by 고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