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1:7-17

 

도전:여호와께서 언제까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12절)

 

상황:하나님을 향해 여호와의 천사가 위의 말씀을 올렸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천사는 누구일까? 왜 그는 이런 말씀을 올리는 것일까? 천사가 이렇게하는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여기 본문에선 어떤 힌트가 보이지 않지만 성경을 보면 어느정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하면 천사는 금대접에 기도의 향을 실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일을 한다. 이것은 천사가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 사이에 뭔가 메디에이팅 역할을 함을 말하는 것일게다. 그러니까 여기에 스가랴가 본 환상 중의 이런 대화는 스가랴 자신이든 당대에 함께 쓰임받은 학개이든 아니면 예루살렘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기도하는 어떤 믿음의 개척자들이든 중보기도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천사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천사의 대언에 응답하시고 70년 노를 푸시는 계획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노의 도구로 쓰인 이웃 제국들이 하나님의 의도하신 노의 수준보다는 자신들의 노까지 섞어 오바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며 그것에 대해서 후일에 손보실 것을 말씀 하신다. 그리고 다시 회복되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희망적으로 말씀 해주신다. 나는 이제 그 천사가 하나님께 올린 말씀처럼 하나님, 언제까지 입니까? 우리 민족을 언제까지 분단된 상태 속에서 계속 두시렵니까?하고 하나님께 묻고 싶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싶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와 나의 가정과 사역에 긍휼을 베푸시는 카이로스 타임이 오는 것을 느끼며 감사드리고 싶다.

 

변화:삼위일체되신 하나님과 나 그리고 그 사이의 천사들의 역동적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보다 성경적으로 명료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공부하자.

 

-->천사론에 대해 연구하고 나의 기도생활을 좀 더 성경적으로 다이내믹하게 할 수 있도록 하자.

Posted by 고직한

슥1:1-6

 

도전:본받지 말아야할 조상.

 

상황:본받아야할 조상이 있으나 본받지 말아야할 조상도 있다. 본받지 말아야할 조상은 주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조상이다. 그들은 악한 길, 악한 행위에 얽힌 삶을 살기 때문에 주님께로 진심으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주님께 귀를 기울이지 아니 하였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초지일관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 듣고 순종하는가이다.  즉 하나님께 로그인되어 있느냐이다. 하나님께 로그인되어 하나님의 생각과 음성을 언제든지 다운로드 받고 그 컨텐츠가 삶 속에 구현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이런 조상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가 본받아야할 조상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 삶과 사역과 나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가장 가치를 두고 해야할 최우선적인 것은 하나님께 항상 로그인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이 내 안에 스캐닝되고 다운로드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변화될 수 밖에 없으며 이른바 시편1편의 '복있는 사람'과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성령의 임재 속에서 QT와 통독과 귀납적성경공부와 말씀 암송과 GBS/GQS와 같은 말씀 사역,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사역이 너무도 중요함을 느낀다.  이게 본질이다. 이것 없이 무엇을 해보았자 그것은 인본주의이다.

 

변화:나 자신이 먼저 나의 후배와 후손들이 정말 본받아야할 선배와 조상이 되도록 하나님께 항상 로그인되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고자 하시는 음성을 다운로드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

 

-->이런 면에서 각자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김정희,오영혜,고하영,고하림,안혜원 등과 의논해서 주의 음성을 함께 들을 수 있는 정기적인 시스템을 만들자

Posted by 고직한

암7:1-17

 

도전:아마샤처럼 살 것인가 아모스처럼 살 것인가?

 

상황: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의 다림줄의 환상을 본 아모스는 그 다림줄대로 예언했다. 다림줄에 전혀 맞지않게 지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이란 건물, 그것은 무너질 것이 뻔한 날림과 부실의 건축물이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그 건축주가 되는 여로보암왕에 대해서 다림줄에서 빗나간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대의 제사장 아마샤에 의해서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는 것이라고 모함을 당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권력자의 측근인 제사장 아마샤, 그러나 그 권력자의 죄악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고발하는 아모스. 점점 나이 들어가며 일어나는 현상 중에 하나는 점점 이런 저런 권력자들과의 거리가 좁혀질 때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나라 운동의 관점에서 분명한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권력자들의 지근 거리에서 아마샤처럼 될 위험성이 아주 많다. 그 권력자들의 죄악이 분명할 때 나는 아모스처럼 말할 수 있겠는가?

아모스의 삶과 역할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엄청난 모함에 시달려야 하고 다른 곳으로 망명하라는 위협을 받는다. 가난과 감옥과 살해의 위협이 있다. 이 모든 어려움과 두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나는 아모스처럼 살 수 있을까?

 

변화: 아모스적 사명을 받아들이자. 기득권층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나는 매사에 있어 아모스적 결단을 해야한다.

 

-->화요일 저녁에 갖게되는 특별 모임과 여타 비슷한 모임과 만남에서 아마샤처럼 돠고자하는 유혹을 떨쳐내고 아모스와 같은 중심을 잃지 말자.

Posted by 고직한

암8:1-14

 

도전: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의 때엔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진다.

 

상황:이스라엘이 여름 한 광주리와 같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수원의 여름의 광주리에 담긴 과일들 중엔 썩어 버려질 것들이 많을텐데 이스라엘도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사람들이 내다버리게될 것을 예고하는것이다. 이런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임하기 전후의 날들의 중요한 영적 특징 중  하나는 진정한 여호와의 말씀이 진해지지 않고 들려지 않아 말씀의 기갈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시대엔 사실 말씀들이 범람한다. 그 다양한 종류와 내용의 말씀들이 얼마나 많나? 언제 어디서든 요즈음 사람들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들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홍수 속의 기갈인 것처럼 일등급의 급수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는 기갈인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더 하고 그 밑으로 내려갈 수록 더 한 것 같다.

 

변화:그렇다면 이런 말씀의 기갈의 시대에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다시 큐티와 통독목회의 중요성을 느낀다.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리얼하게 접하도록 하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다.

 

-->월요일을 이용한 정기적인 큐티목회세미나를 곧 시작하고 월요일 저녁있는 '그 안의 스케치북'의 오디오바이블리딩 시간을 귀하게 여기자.

 

Posted by 고직한

암7;1-6

 

도전:메뚜기와 큰 불로 이스라엘이 망하는 환상을 본 아모스의 기도에 이미 정해진 뜻을 접고  실행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 

 

상황:기도 중에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한 아모스가 알게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 계획이다. 메뚜기로 모든 농작물을 황폐케해서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던 것이다. 그래도 제대로 회개하지 않을 이스라엘에 큰 불을 일으켜서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게하실 생각을 하나님은 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될 것인가? 이 계획을 알게된 아모스가 할 일은 무엇인가? 당연히 하나님께 중보기도하였다. 야곱이 너무 약하다고! 야곱이 너무 불쌍하지 않냐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실행계획을 하나님께서 접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아모스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심판 직전에 그 심판을 막아선 셈이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파워이다.

얼마 전 QT했던 요엘2:12-17에서도 같은 메시지를 발견했었다. 다시 한 번 그 때의 묵상을 돌아 보자.

                                요엘2:12-17

        도전:예고된 완전 절망의 끝자락에서 전달되는 '이제라도 회개의 실오라기 희망이 몰고오는 '은혜의 태풍

        상황:요엘을 통해 전달되는 여호와의 심판의 날은 완전 절망의 날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판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과 그러나 회복이다. 그러나 그저 적당히 가다보면 구원과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라도'라며 마지막

               반전의 기회를 주신다. 이제라도 금식하고, 이제라도 울며 애통하고, 이제라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실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개척자들이 할 일은

               금식일 정하고 성회의 소집이다. 백성, 장로들,어린이와 심지어 젖 먹는 자도 모으고 신랑신부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는 초강력적인 동원이 일어나야 한다.그리고 제사장들은 울며 기도하라는 것이다.그 기도의 내용은

               두가지이다."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

               소서(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사실 한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 요엘식의 초비상적인(심지어 바로 전날 결혼하여 신혼 첫밤을 보내는 신랑신부

               조차 참석해야하는) 총동원의 금식일 선포와 대회개의 날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일을 하며 또 어떻

               게 해야 하나? 그 흔해빠지고 진정성이 결여되고 오히려 술수와 장삿속이 판치고 묻지마식의 무작정 동원이

               이루어지는 그런 '성회'는 더 이상 필요없다. 그러나 풀뿌리 차원의 자발적 회개와 지도자들의 진정한 회개

               가운데 일어나는 요엘식 금식기도회는 반드시 필요하다.

      변화: 하나님께서 뭔가 신선함을 갖고 있는 주요 리더들과 요엘식 금식기도회가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나와 관련된

              사람들과 그 뜻을 나누어보자

 

변화:한국의 민족사와 문명사 속에 아주 중요한 이번 대선을 앞두고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로 바뀌는 막판뒤집기의 중보기도를 내가 솔선수범하며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서도 이 중보기도를 일으키자! 

 

-->이번 12월 4일부터 3박4일 간의 비상금식기도회에서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고 내가 맡은 강단사역을 이런 관점에서 말씀 나누고 기도를 일으키자.

Posted by 고직한

암6:8-14

 

도전: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미워하실 때가 있다.

 

상황:야곱은 얍복 나루터에서 천사와 싸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이스라엘)'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된 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계보를 잇는 장자권의 영광을 얻게되었다. 그러나 이 영광은 어디까지나 야곱이 하나님의 성품에 맞게 살 때 주어지는 영광이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거나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삶을 살 때조차도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영광은 아닌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정의를 쓸개로 바꾸었고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꿔버리고 허무한 것 곧 우상을 기뻐하는 지경에까지 나아갔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 쌓인 영광을 미워하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미워하신다면 반드시 어떤 액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타날 수 밖에 없으니 그것은 이웃 나라를 통한 끔찍한 재앙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수없이 반복된 일이다.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사17;4)

나의 삶 속에도 이와같이 '나의 영광'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실 때는 없었을까? 내가 섬기는 사랑의교회도 하나님께서 '사랑의교회의 영광'을 미워하시는 때는 없었을까?  돌아보면 두렵고 떨리는 일이 없다고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나와 교회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더욱 잘 맺는 일의 중요성을 느낀다. 그렇게하면 나훔2:2에서 예언된 것처럼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변화:나에게도 있을 수 있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야곱의 영광'이 무엇인지 좀 더 철저히 살펴 보고 회개하자.

 

-->오늘 EXTENDED QUIET TIME을 충분히 가지며 나를 돌아 보자.

 

 

Posted by 고직한

암6:1-7

 

도전:안일과 향락에 빠져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서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6절)

 

상황:이스라엘의 안일과 향락을 말하는 7개의 동사(눕다, 기지개 켜다, 먹다,지절거리다,제조하다,마시다,기름을 바르다)를 보며 뭔가 오늘날 강남스타일 크리스찬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사실 나는 귀차니스트이다. 그리고 우아한 삶을 원한다. 그래서 뭔가 그런 강남스타일에 끌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요셉의 환난’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시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라는 점이다. 나의 ‘환난받고 있는 요셉’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분명 요셉의 환난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강남스타일로 사는 크리스찬들이 사로잡혀갈 것, 즉 그들 자신이 환난받는 요셉처럼 될 것을 말씀하신다.

 

변화:탈북자들과 북한 주민들에 대해 보다 적극 관심을 갖고 돕자

 

-->G & M KOREA 재단의 탈북자 지원 사역에 대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자

Posted by 고직한

암5:21-27

 

도전:공의가 빠진 예배만능주의의 문제점

 

상황: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와 성회들과 여러 종류의 제사들과 찬양들을 돌아보지 않겠다 하신다. 오히려 열방의 왕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볼모로 끌려가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유는 공의와 정의가 빠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정의로운 삶을 다 원하신다. 그러나 예배자의 정의로운 삶이 빠진 예배를 역겨워 하신다. 물론 예배가 없이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에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자기 의가 가득하고 자기 교만으로 가득한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복음주의 크리스찬들의 경우, 은사주의 크리스찬들은 더 그렇고, 예배를 무척 강조한다. 거의 예배만능주의라고나할까? 그러나 아무리 뜨거운 예배라 할지라도 예배인도자와 예배자에게 공의와 정의에 대한 각성과 분발이 일어나지 않고 예배를 인도하고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실 뿐 아니라 분노하신다. 이런 종교적인 예배와 성경적인 예배의 근본적 차이를 아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변화:나의 영성과 예배는 공의와 정의를 진작시키는지 돌아 보자

 

-->큐티진에 매월 실는 QT CLINIC에 이 주제에 대해 심도있게 쓰도록 하자.

 

Posted by 고직한

암5;14-20

 

도전:정의가 없는 삶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거부하신다.

 

상황:예배자가 전혀 정의롭지 못하고 공의롭지도 못하면서 온갖 종교행위들을 한다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역겨워 하신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뱉으시고 내치신다. 그 종교행위의 본질인 우상숭배의 그 우상으로 인해 배반 당하고 망신 당하게 된다.

지금 한국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다. 예배와 영성을 아주 강조하고 최우선시하나, 예배자나 예배인도자 개개인의 윤리도덕적 삶에 정의와 공의가 결여되어 있고 공공신학적 관점 역시 거의 없다싶이 하다. 그 가운데 온갖 성회와 집회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윤리성과 사회성으로 나타나지 않는 영성은 여타 종교의 영성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내가 한국교회를 말하기 전에 나와 나의 사역을 돌아보자.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적으로 문제될만한 것은 없는가? 

 

변화:하나님 앞에 철두철미하게 나를 살피고 끊임없이 주의 보혈을 의지하여 씻어내고 '정직과 감사의 열매'를 아주 풍성하게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랑의교회에서 6년째 하고 있는  정감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자. 이번 주 새벽의 정감새벽나무에서의 설교와 기도회 인도를 영성과 윤리성의 통합적인 관점에서 섬기자.    

Posted by 고직한

암5:14-20

 

도전:어떤 크리스찬에게는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로 돌변할 수 있다.

 

상황:사람이 간신히 사자를 피해 굴 속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느닷없이 곰을 만나게 되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가슴이 철렁하겠는가? 또는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다 대었는데 뱀에게 물리는 상황은 어떤가? 정말 질겁할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는 없고 여전히 악을 행하면서도 신앙유사행위 속에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로 생각했다가 사실상 심판의 날로 나타나는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엄청난 착각이 빚어내는 비극이다. 희망의 반전이 아니라 절망적 반전이다.

오늘날 구원의 확신이란 것도 이렇지는 않을지? 부분적,단편적 교리에 의존해서 예수님 믿으니 구원받고 영생을 얻으니 이제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는 경우가 그럴 수 있다. 분명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구원받을만한 믿음은 반드시 가치관의 변화의 행위의 변화와 삶의 내용의 변화를 가시적으로 , 검증가능하게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열매가 맺힘없이 단지 교리에만 기초하여 구원의 확신을 말하는 것은 나중에 구원의 날일줄 알고 잔뜩 기대하였다가 심판의 날로 돌변하게될 때 놀라자빠질 수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종교행위를 성경적 신앙행위로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구원의 확신이란 것은 일종의 착시현상일 수 있다. 성경적 신앙행위는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라든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변화:내 삶에 있어 최선을 다해 선을 구하고 악을 미워하자.

 

-->현재 준비 중인 '감사나눔우체국'을 사랑의교회 마당에 만들어 운영하는 일을 기도하면서 아주 적극적으로 하자.

 

Posted by 고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