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9:1-13

 

도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죄사하는 권능을  사람으로서 역시 할 수 없는 중풍병자를 단번에 일어나게 하는 일을 통해서 보여주신 예수님. 양 권능을 갖고 계신 예수님.

 

상황:그렇다.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능과 치유의 능력을 다 갖고 계신 분이시다. 모든 병이 다 그 사람 본인의 죄 때문은 아니나, 이 땅에 죄가 들어온 결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능을 갖고 계신 예수님께서 치유의 권능까지 갖고 계신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나의 아들의 질병도 예수님의 죄를 사하시는 권세에 힘입어야 하고 동시에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에 매달려야 한다. 중풍병자를 매고 온 친구들이 있어 예수님에 의해 그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았듯이 나도 아들을  예수님께로 더 가까히 나아가도록 중보하고 도와야 한다. 아주 감사한 것은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읽고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하고 또한 깊은 예배 속에 들어가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는 점이다. 이미 예수님의 죄사함의 권능과 치유의 권능이 아들에게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다만 이것이 지속적으로 나타나서 아들의 상태가 지속적으로 건강해지고 좋아졌으면 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의 그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일이 일어나게 되길 구한다. 아들의 작사작곡한 음악들이 그렇게 쓰이고 아들의 기도가 그렇게 쓰이길 구한다.

 

변화:예수님의 죄사하는 권능과 치유의 권능, 이 양 권능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것이므로 아들의 현재 치유가 지속적으로 진행될 것을 믿고 불안해하지 말자.

 

-->오늘 아들과 함께 오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

Posted by 고직한

본문: 마8:1-17

 

도전:예수님을 놀라게 한 가버나움 백부장의 정말 큰 믿음

 

상황:"와, 제가 나를 저렇게 크게 나를 신뢰하다니!" 이것이 백부장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첫째,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면서 로마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은 것이아주 놀랍다. 형통적으로 선민의식이 강하나 정작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이 이방인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엄청 컸던 것이다. 둘째,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의 중풍병을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오시지도 않고 멀리서도 명령 한마디로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었다.  내게 필요한 믿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백부장은 하인의 중풍병과 예수님의 말씀 사이에 어떤 치유적 관계가 있음을 갈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백부장이 자신이 명령체계 속에 있는 사람으로서 상관의 말에 자신이 복종하고 자신의 말에 하인이 복종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과 중풍병자의 병이 어떤 명령체계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말 한디로 멀리 떨어져서 중풍병을 고치심으로써 사실인 것으로 입증이 된 셈이었다. 백부장은 중풍병이 단지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육체적 작용만이 아니라 즉 예수님과 무관한 별도의 독립된 체계 속에서 나름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통전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을 아주 높은 존재로 여기셨다. 백부장 정도면 사실 그 집이 예수님을 모실만했을 것이다. 세리의 집에도 들어가시는 예수님이신데.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요즈음에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말하며 하나님의 침소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아주 필요한 관점이다. 그러나 이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을 향한 근본적인 경외심 없이 예수님과의 친밀감을 말하면 마치 뭘 모르는 아이들이 예수님의 침소를 소중한 줄 모르고 마구 드나들고 침대 위에서 예수님은 아랑곳 않고  마구 뛰어노는 것과 뭐가 다를까?  다섯째,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을 정말 사랑했음에 틀림이 없다. 예수님께로 하인의 중풍병 문제를 들고 나간 것 자체가 애정없이는 안되는 일이다. 자신의 수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다 실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었다. 호기심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었고 자기 과시적인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하인에 대한 순수한 애정 속에서 백부장은 예수님께로 나갔던 것이다. 

도대체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알았을까? 물론 오늘날 정보과 형사처럼 그 지역의 새로운 뉴스를 가장 먼저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클 것 같다. 꾸준히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도 갈증도 컸을 것이다.  하인들과도 상당히 인격적 관계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입소문을 듣고 얘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나름, "이 분은 다윗의 자손 메시야임에 틀림없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변화:백부장과 같은 특별한 그리고 아주 큰 믿음을 갖자! 예수님도 놀라실만한!

 

-->아이들의 건강과 young2080의 사이버 사역에 필요한 재정모금에 있어 이 백부장의 믿음을 갖고 기도하며 액션하자.

Posted by 고직한

본문:마7:1-12

 

도전: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찾아내어 뽑는 일을 가장 먼저 하자.

 

상황:들보란 집을 짓는데 있어서 가장 길고 큰 재목을 말하고, 티는 들보에서 어쩌다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이나 먼지를 말한다. 예수님은 바로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스스로 합리화하거나 자기 만족이나 자기의에 빠져서 그렇지 정작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못느끼고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나 자신을 하나님의 현미경으로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내 눈으로만 보니 내 몸의 수억의 대장균을 못보고 들보와 같은 진득이의 애벌레들이 득실한 것을 못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현미경으로 보면 내 눈 속에 엄청난 들보들이 있는 것이다. 이 들보들을 찾아내어야 한다. 이 말은 내가 먼저 하나님의 심판권 밑에 서있어야 함을 말한다. 현미경을 들고 계신 심판자 앞에 내가 서야한다. 아마 하나님의 현미경 역할을 하는 존재는 나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다. 나의 가족들, 특히 나의 아내 그리고 나의 직원들과 동료들 그리고 친구들은 나의 들보들을 알고 있다. 내가 그들로 하여금 내 들보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아서 그들이 말을 안할 뿐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보아도 나에겐 엄청난 들보들이 있다. 나만이 알고 있는 내 성향들과 기질들 그리고 욕망들, 그런 것들이 교묘하게 작용하여 완전범죄를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도한다. 그리고 감춰진 죄로 물든 신념들 속에서 자행되는 문제들----아 내겐 얼마나 숱한 들보들이 있는가!

 

변화: 하나님의 현미경(말씀과 성령, 가족과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나의 양심) 에 비춰 내 눈 속의 들보들을 보게되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으로 그것들을 씻어내야 한다. 

 

-->정**목사와 같이 내 안의 억만 죄를 보고 토로하는 시간들을 많이 가져야 한다. 그 후 부어주시는 성령을 체험하고 싶다!

 

Posted by 고직한

본문:마6:19-34

 

도전: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상황: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의식주 문제를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근심걱정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일차적이며 궁극적인 관심이 땅이 아닌 하늘에 있어야 한다. 사실상 땅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좀,동록과 도둑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무척 피곤한 일일 뿐 아니라 경비 또한 엄청 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둔다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다는 의미도 있으나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보물을 어떻게 하는가? 나의 보루은 과연 무엇인가? 나의 시간과 육체적인 노력이 재화를 나을 수 있으니 우선 그런 것들이 나의 보물이다. 나의 중보기도 역시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이라면 역시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들고나가는 것 자체도 보물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내가 벌거나 일을킬 수 있는 재물이 보물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런 보물들을 기꺼히 하늘에 쌓고자 하는가?

설령 내가 저축을 한다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한다하여도 정말 그 궁극적인 동기와 목적이 내가 그 모든 것들을 하늘에 쌓아 두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가?

 

변화:지금까지 내가 나름 먼저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약속대로 의식주 문제 걱정없이해결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의 노후 역시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을 믿으며 돈 문제로 얽힌 추한 노후가 되지 않도록 더 순수한 마음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자.

 

-->새롭게 추진되고 있는 사업과 프로젝트들에 임함에 있어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자. 이게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길이다.

Posted by 고직한

본문:마6:5-18

 

도전: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

 

상황:외식하는 자들의 문제는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을 더 의식하는 데 있다.  외식하는 자들은 사람이 없는 은밀한 곳에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보다는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한다. 그리고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기를 마치 내가 뭔가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행동주의 실적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은밀한 중에 하나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인격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모르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경청하려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금식할 때조차 마치 전혀 금식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꾸미라고' 가르치신다. 위선이 아닌 '위악'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말은 사람들이 내가 금식하고 있는 것을 인지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라는 것이다. 철저히 하나님만 의식하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바로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도 외식하는 자의 범주에 있다. 어느 사이에 나도 오랜 신앙생활, 교회생활,사역자 생활을 해오면서 어느 사이에 내 안에 외식하는 자의 모습이 생겼고 그것이 두터워졌음을 느낀다. 어찌할꼬?

 

변화:나는 합심기도를 믿는다. 그러나 합심기도를 이끄는 시간과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와 교제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1:10의 비율로 하자. 내가 합심기도를 이끄는 시간은 아주 작은 빙산의 일각이고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은 빙산 밑의 밑둥처럼  훨씬 커야 한다.

 

-->외식과 위선의 기회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사람 만나는 절대시간을 줄이고 하나님 앞에서 '은둔생활'의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자. 

Posted by 고직한

마5:21-37

 

도전:살인,간음,맹세에 관한 예수님의 율법 재해석에 비추어 나는 완전 지옥불에 들어갈 자이다.

 

상황:존재론적으로 나는 바리새인과서기관의 계열에 있다. 20절에서 예수님은 내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예수님의 아주 높은 기준에 비추어 완전히 박살내버리신다.그렇다면 내 의라는 것도 예수님 앞에선 설 자리가 없다.나는 완전 지옥불에 들어갈 자이다.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주 예수시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 외에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래서 주의 자비를 입고 내가 예수님의 표준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시도와 노력하는 것 외에 있을까? 이를 위해 내게 성령주시고 성경주시고 성도들을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변화:주님 저는 살인자이며 간음자이고 거짓 맹세하는 자입니다. 주님 저야말로 지옥불에 들어가기 마땅한 자입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오늘 출퇴근 시 차 안에서 하림이가 작곡작사한 예수기도의 '미러클 송'을 계속 따라 부르면서 예수기도를 수백번 하나님께 올려드리자. 마치 눅18:13의 세리처럼 기도하자. 

Posted by 고직한

마3:1-17

 

도전:회개는 존재기반을 허무는 열매로 나타나며 자의식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준다.

 

상황:세례요한의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이었다. 그리고 특별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고 속으로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도전하였다.  회개는 단지 죄의 자백만이 아니다. 하나님과 의를 향한 태도의 전환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그 의의 열매로써 드러난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존재기반 자체와 그들의 문화 자체가 위선과 집단적 이기주의 속에 단단히 굳어진 지반에서 사는 것이었으므로 진정한 회개를 하여 의의 열매까지 맺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늘 자신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근거가 없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크리스찬들과 같았다. 열매로써 보이지않는 회개는 진정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외적으로 가시적인 열매만이 아니라 내면의 자의식의 변화를 일으킨다. 한 편으론 구원의 확신으로 감사하지만 또 한 편으론   "내가 이러구도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라며  자기 성찰적 질문을 던지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즉 오만한 선민의식이 아니라 겸손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회개는 내적으론 이런 겸손한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외적으론 가시적인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것이다.

 

변화:나는 어떠한가? 나는 직업상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부류 속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집단적으로 위선과 외식의 존재기반 속에서 나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도 세례요한에게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소릴 들을 만하지않을까? 어느 사이에 나도 독사의 자식층에 속하고 있다. 내가 진정 회개를 하는 것이라면 이 존재기반을 떠날 각오를 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누가 그런 말을 할 때 공감했다. 돈 벌기를 포기한 변호사는 아주 무섭다. 한 때 박원순변호사가 그런 부류에 속하였을 것이다. 승진을 포기한 공무원도 아주 무섭다. 다음의 국회의원 공천받는 것을 포기하고 당 실세의 눈치 보지않고 오직 국민만 의식하고 일하는 국회의원도 무섭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특권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만 위해서 살아가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다면 그의 열매는 엄청 놀라울 것이다. 내가 진정 회개를 한다는 것은 이런 나의 존재기반 자체에서 눈치보지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역류하는 삶을 과감히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H목사님과 만나서 나의 존재기반이 무너질 수도 있으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위한 논의를 하고 액션하자.이것이 내가 맺어야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길이다.   

 

Posted by 고직한

마1:18-25

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도전:예수의 오심은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이었으나 마리아의 순종과 요셉의 순종적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상황:하나님의 의도와 주도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도 관련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진실하고 협력적인 순종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다. 요셉이 자기의 의로움에 갇혀서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를 그냥 조용히 관계를 끊어 버렸으면 요셉의 가문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계획은 일단 좌초하게 되었을 것이다.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요셉에게 요셉의 가문을 통한 구속사적 계획을 알려주었을 때 요셉은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서 예수님은 요셉의 가문을 통해 오시는 것이 가능해졌다. 마리아를 자기의 집으로 데려와서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은 요셉의 고도의 절제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리아가 요셉의 집으로 왔을 때는 임신한지 얼마 되었을 때 이었을까? 만약 요셉의 보통 남자들처럼 욕정의 사람이었고 마리아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무시해버리는 무지몽매한 남자이었다면 예수의 오심도 순탄치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가 10%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관련된 사람의 철저한 협조를 필요로 한다. 이만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협조할 것인지 아니면 비협조할 것인지의 가능성을 놓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risk가 있는 행동을 하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는 적극 협조하여 그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게 되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청년사역과 W.H.O.(WOUNDED HEALER'S OASIS) 사역에 비전과 부담을 주셨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가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내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꿈에 협력함을 통해 그 꿈의 실현을 도와드려야 한다. 나의 도움을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신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황홀하다. 하나님과의 동업이 아닌가?

 

변화: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믿는 나의 숙원사업을 내가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게 푸실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정말 놀랍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이면 될 일이므로 될 것이다. 다만 나는 이런 하나님의 인도에 유비무환의 자세로 준비하고 적극 협력하자.

 

-->최교수와 김대표에게 하나님께서 기름부어주시도록  오늘  한 시간 이상 기도하자.

Posted by 고직한

마1:1017

1.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족보는 이러하다.
2.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요담을 낳고, 요담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모스를 낳고, 아모스는 요시야를 낳고,
11.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무렵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아우들을 낳았다.
12.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사독을 낳고, 사독아킴을 낳고, 아킴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17.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으로 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잡혀 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

 

도전:일상과 평범과 작은 역사의 고리들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구속사적인 특수성이 드러난다.

 

상황:아브라함,다윗,바빌론 시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까지 각각 열네대 씩을 거쳤다. 예수님의 오심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 족보의 한 순간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오래 전부터의 치밀한 계획과 주도면밀한 개입에 의해서 오신 것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42대 손인 예수를 생각해 보면 세상의 갓 태어난 어느 누구를 찍어도 그런 족보는 나오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철저히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 평범함과 일상과 작은 역사의 고리들의 연결 속에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과 개입이 있었다. 나 역시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사실상 나의 할아버지 정도까지 밖에 모른다. 그러나 나의 모든 유전인자와 선조들의 역사도 나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를 향해서도 하나님께서 주도면밀하게 개입과 간섭을 하셔서 내가 오늘의 내가 되었고 앞으로의 나를 이끄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하나님의 주도성에 내가 민감하고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 내 정체성 100%가 드러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주도적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아니 그 전에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나를 빚고자 하시는 모습은 무엇일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아주 명백한 것은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흠없이 점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아주 온전해지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이런 나를 향한 의도성과 주도성을 정확히 읽을 때 나는 내가 되고 내가 할 일이 더욱 분명해진다.

 

변화:2013년이란 새해! 이 한 해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의도성과 주도성이 100% 반영되게 하는 삶이 되도록 하자!  

 

-->나를 향해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의도와 주도적인 계획과 뜻을 내가 온전히 스캐닝받는 일부터 해야한다. 오늘 새 해 첫날 나 개인적으로 그리고 가족과 함께 그런 스캐닝받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자!

Posted by 고직한

누가복음 1:67-80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도전:요한은 자신이 목표지가 아니라 그 목표지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이정표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태어났다. 그 아버지 사가랴는 이 사실을 성령충만한 중에 알게되어 하나님을 찬양한다.

 

상황: 태어날 요한으로 인해 10개월 이상 벙어리가 된 사가랴가 입이 풀려 성령충만해져서 입을 열어 발하는 첫 메시지가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태어나실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선두주자라는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를 알리는 이정표 인생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 주인공의 길을 예비하는 조역이지만 그 주연이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높으신 이이기 때문에 그 조역은 아주 영광스러운 조역이다. 이 사실을 감지한 아버지 사가랴는 사실 이런 인생을 낳기 위해 10개월 이상 벙어리가 되는 고통을 겪었다.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강요된 침묵 속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일방적으로 타자의 말을 듣기만 해야했던 사가랴,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과 뜻을 헤아리는 가운데 깊은 묵상 속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사가랴는 자신의 아이의 운명에 대한 아주 분명하고 확고한 관점이었다.

나는 나의 두 아들을 놓고 어떤가?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의 임재라하여 하영,하림이라 이름하였건만 나는 하영하림에 대한 그 부르심과 역할이 자신들이 목표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이정표이며, 주연이 아니고 그 주연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하나의 조연이라는 정체성과 역할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기도하고 있으며 준비시켜왔는가? 사실 부끄럽다. 어쩌면 사가랴에게 있었던 강요된 고통의 침묵 이상으로  내게도 고통의 기간이 컸으나 그저 견디어 냈을 뿐이지 아이들을 그렇게 운명짓고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의도를 적극적으로 읽어내지는 못하였다.  

 

변화:예수님을 위한 이정표 인생, 조연의 역할, 선두주자의 역할을 하영이와 하림아가 철저히 인식하고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최선을 기울여 돕자.

 

--> 하영하림이와 어제 밤처럼 신뢰 속에 나의 깊은 속내를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좀 더 자주 갖자. 그리하여 우리 가정이 wounded healer로서 쓰임받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선두주자 가족이 되도록 세례요한처럼 광야기간을 갖자. 

  

Posted by 고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