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22:34-46 (YOUNG2080 QTZINE)

 

도전: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나사렛 예수가 그 그리스도와 어떻게 관련되느냐에 의해서 인생이 달라진다.

 

상황: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질문을 던져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 했는데, 어찌 다윗은 그를 주라 칭하여 말하였는지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대답해 보라 하셨다. 그러나 아무도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시110편 1절(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에 나오는 다윗의 시를 갖고 질문하신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시면서 다윗이 “내 주”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신 예수님 뿐이다. 나는 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는가? 내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예배하지만 혹시 나는 뒷방 영감처럼 가끔 자실 음식이나 갖다 드리고 격려 차원의 몇 말씀만 해드리는 식으로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질문에 답하여 주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말씀(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에 의거해서 나는 예수님을 나의 전 삶의 영역에서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며 사는가?

나는 솔직히 회개할 것이 너무 많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뒷방 영감 취급해 왔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변화:주님, 저는 당신을 주라 고백하고 가르치면서 정작 나의 심령과 삶 속에선 뒷방 영감처럼 대해왔음을 회개합니다. 긍휼히 여겨주시고 제가 완벽히 예수체질의 사람이 되고 당신의 핵심강령의 순종자가 되게 하소서!

 

---> 위의 기도를 하면서 내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는 이 말씀과 십계명을 마음 속에 새겨야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그 핵심 강령의 주인공되신 예수님을 향해 예수기도(“주 예수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가능한 한 무한 반복할 필요가 있다.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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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마22:15-33(YOUNG2080 QTZINE)

 

도전: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자의 무지와 무능을 깨야 한다!

 

상황: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영적 무지와 무능의 문제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그 질문은 정당하게 답변이 되어야할 질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질문의 난해성 보다는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하고자 상의하여 나온 불순한 의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직접 대놓고 문제삼지 않고 난해한 질문에 대해 그 누구도 문제 삼을 수 없는 명답을 내 놓으셨다. 그러시면서 지적하시는 것이 바로 그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경에 임하는 자세에 불순한 의도가 있으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눈이 멀어버릴 수 있음을 암시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잔지 수학이나 과학 서적이 아니다. 성경은 임하는 자의 의도성과 이해력 사이에 상관성이 일어나게 만드는 책이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책이다.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대해 모르면 그들이 성경을 봐도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 교훈만 붙잡을 것이다.   나에겐 성경을 대할 때 이런 바리새적 사두개인적 문제점은 없는가? 과연 나는 성경에 진정한 구도자적 의도를 갖고 성경의 맥과 디테일을 연구하고 그 성경에 의해 내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서영을 보는가? 아니면 차가운 지성주의 프레임 속에서 성경을 보는가? 성경을 대하는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HONEST QUESTION, 열린 세계관의 FRAME을 갖고 성경을 대해야 한다는 것.

 

변화:성경을 잘 알고 하나님의 능력도 역동적으로 체험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싶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 못했다  

   성경 잘 안다                                    I 상한                                   II 상한

 

   성경을 잘 모른다                            III 상한                                   IV 상한

 

 I 상한--->기름부음이 있는 복음주의 (또는 NEO CHARISMATIC ?)      Cf. 에스라(스7;6,10) 형 인물,바울 형 인물

II 상한--->오늘날 많은 건조한 복음주의자들

III 상한--->오늘날의 많은 은사주의자들

IV 상한--->날라리 크리스찬들

 

 

-->무엇보다 BIBLE READING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도를 위해 많은 시간을 떼어 놓자. 외부 소통과 내부의 방해를 완전 차단하고 BIBLE READING과 기도에 전념하는 시간 확보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약속을 최소화하자. 그리고 집에서 가장 조용한 시간대를 확보하도록 하자.  

 

Posted by 고직한

본문:마22:1-14(YOUNG2080 QTZINE)

 

도전: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상황: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일상의 이유들로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종들로 하여금 길거리에 나가서 있는대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였다. 이 때 길에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대로 다 데려왔다고 한다.  이 비유를 드시고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하시는 말씀은 이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청함을 받았으나 청함에 실제 응함으로써 잔치에 참여한 자, 즉 택함을 입은 자는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천국 초청을 받았다고 천국에 택함을 받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교회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택함받은 천국백성으로 착각할 수 있다. 마치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CLOSE CONTACT은 했으나 REAL CONTACT을 안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 점에 있어 나는 어떠한가? 과연 나는 초청을 받고 그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자인가? 그렇다면 내 마음과 삶 속엔 천국잔치가 정말 있는가?  천국의 왕이 있고 그 아들이 있으며 잔치상이 있고 음악이 있으며 하객들이 함께 즐거워하는모습이 내게 있는가? 교리적으로  구원의 확신이나 예정론적 선민의식을 갖고 있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내게는 잔치의 주인공 예수님과 함께 하는 CELEBRATION이 있는가?

 

변화:잔치에 초대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 참여하고 잔치를 누림으로써 내가 택함 받은 백성인 것을 늘 확인하자. 그리고 건강한 자의식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키워 가자.

 

-->곧 있게될 FIC 사역에서 예수님 잔치가 경험되게 준비하자.

 

 

 

Posted by 고직한

본문(YOUNG2080 QTZINE):마21:33-46

 

도전:하나님나라를 너희는(대제사장들과 바래새인들)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절)

 

상황: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지도자들은 어떤 삶을 사느냐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것인가? 분명히 예수님은 저들이 불법을 행하고 참 열매를 맺지못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그들은 단지 잘못을 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포도원 주인의 상속자를 죽인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비추어 우선 나를 살펴보고 또한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어떠할지? 무척 조심스러운 적용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열매로 판단하신다는 점이다. 나는 과연 하나님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인가? 두렵고 떨린다. 구원의 확신이 하나님나라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열매가 보장해준다. 나는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그리고 복음으로 생명을 낳아 열매를 맺고 있는 자인가? 나는 팔복에 자는 삶을 사는가? 십계명에 비추어 나는 범법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이른바 의로운 일이라하여 하는 일도 그 내면의 동기를 살피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면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문제를 마치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구원받을만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명심하자.

 

변화:나의 내면과 성품의 열매들과 구령의 열매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위한 삶의 열매들을 냉철히  살펴보자. 좀 더 분발하자.

 

-->특별히 나의 부르심인 젊은이들에게 구령의 열매가 더 잘 맺히도록 힘쓰고 저들을 하나님나라를 위한 제자 삼는 일을 더 힘쓰자  이제 곧 시작할 FIC(FREEDOM IN CHRIST)사역에서 열매를 맺도록 힘쓰자

Posted by 고직한

QT 본문:마21:23-32

 

도전:변성,변질된 제도권 지도자들의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가르치는가?"라는 공격에 대한 예수님의 반격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해 세례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참된 변화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암시하심으로써 제도권에서 부여하는 '권위'의 문제점을 드러내신다.

 

상황:세례요한은 당대 제도권이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제도권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다. 예수님은 제도권이 변성되고 변질될 때 일어나는 그 심각한 병폐를 너무 잘 아셨다. 제도권은 진실이나 권위의 문제를 제도권 안에서만 해결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제도권의 지배구조 안에서  진실을 왜곡,조작할 수 있다. 또 권위에 손상을 가할 수 있다. 예수님은 타락한 지배구조가 새 엘리야로 온 세례요한을 죽인 것을 꿰뚫어 보셨다. 나는 요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보며 이른바 담임목사를 정점으로 하여 당회와 교역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해서 하나님께서 밑에서부터 일으키시는 변화의 운동을 얼마나 처참하게 압살할 수 있는지 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도권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 뿐만 아니라 제도권 밖에서 민초들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신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과정에는 개혁자들도 인간이므로 여러가지 문제들도 노출될 것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성되고 변질된 종교지도자들이 점점 사탄의 도구화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변화:나는 진정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가 있는가?  그 신적 권위를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는가? 내게 주신 권위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나는 제도권의 지배구조가 나를 압살시켜려해도  위축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직접 감동을 주시는 사람들을 제도권 안과 밖에서 일으키자.그래서 그들이 종교개혁의 인자들이 되게 하자.

Posted by 고직한

본문:마12:22-37

 

도전:"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33절)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35절)

 

상황:그렇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과연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이다. 내가 성령으로 거듭났고 성령께서 내 안에 처소를 삼아 좌정하시고 내주하여 계시다면 당연히 나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령으로 인해 내 안에 선을 쌓을 것이고 그것은 자연스레 선한 것을 낼 것이다. 열매가 그 나무의 결과이다. 구원의 씨앗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들에게 성령에 의해 뿌려지고 그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그 열매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나 구원의 증거인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나 자신이 진정 성화되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다. 나는 진리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성령은 사랑의 영이다. 나는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변화:내가 하는 정감운동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예수님의 이런 '나무와 열매'의 관점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무슨 율법주의적 캠페인일 뿐인가? 예수님의 관점에서 출발했다면 나와 정감운동이 주력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곧 정감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즉 정감 DNA를 갖게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곧 정감의 열매이다. 정감인으로의 변화와 성장과 성화라는 관점에서 양육과 훈련을 하는 성경공부 교재가 절실히 요청된다. 이 과제를 놓고 기도하며 리서취해보기 시작하자.

 

Posted by 고직한

본문:마12:1-21

 

도전:성전보다 크신 주님, 안식일의 주인되신 주님께서는 다투지도 아니하시고 들레지도 아니하시고 길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을 정도의 분이시다. 그리고 그 분은 상한 갈때를 꺽지 않으신다!

 

상황:성전보다 크시다는 주님의 발언과 안식일의 주인이라며 하신 행동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 발언과 행동은 정말 무게가 있는 말이다. 이런 주님께서는 다투지도 아니하시고 들레지 아니하신다. 즉  야단스럽게 떠드시는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자신이 곧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얼마나 온유하신지 상한 갈대를 꺾지도 않으신다. 그 분은 열방들까지 심판하실 분이신데도 말이다.

내가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나의 못된 성화되지 못한 기질이나 습관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나의 가족들에게 화를 잘 내는 편이다. 짜증도 많다. 진실을 말하고자 할 때 흥분을 한다. 큰 소리를 지른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습은 결코 아닌 것이다. 어쩌면 나의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있어 상한 갈대와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내가 그들에게 화를 냄으로써 그들을 꺾곤 하다니!

 

변화:들레지 않는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며 내 심령에 각인되게 하자.

 

-->아내와 자녀들에게 예수님처럼 들레지 않고 조용조용 말하기를 실천하자!

Posted by 고직한

본문:마10:2-15

 

도전:예수님의 훈련방법 전도 여행-천국이 가까이 왔다

 

상황: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여행을 떠나게 하실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와 함께 1)병든 자를 고치며 2)죽은 자를 살리며 3)나병환자를 깨끗게 하며 4)귀신을 쫓아 내도록 empowering 해주셨다. 전도자로 쓰임받으려면 전할 컨텐츠도 있어야 하지만 뭔가 그 컨텐츠를 전달할 대상들에게 줄 수 있는 확실한 도움거리가 있어야 한다. 사실 예수님의 이 방식은  NCD의 슈바르츠박사가 말하는 FELT NEED CENTERED EVANGELISM의 전형이다. 전도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는 뭔가 FELT NEED를 채워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교육, 의료일 수도 있고 비지네스적 도움일 수도 있다.

이 점에 있어 오늘날 젊은이 전도는 어때야 할까? 젊은이들의 FELT NEED와 복음의 접점을 어떻게 만드는 것이 좋을까?

 

변화:현재 벌어지고 있는 K-MOVE의 흐름과 SOCIAL ENTERPRISE나 새로운 협동조합법 등의 뉴트렌드를 파악하면서 젊은이들의 3대 필요인 'JMS-JOB,ME,SEXUALITY'를 건드리고 제대로 도와줄 수 있는 방법들이 있어야 한다.

 

-->오늘몇 사람이 만나 의논할  FREEDOM IN CHRIST의 사역도, 지금까지 지원해온 DUNAMIS 사역도  이런 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

Posted by 고직한

본문: 마9:14-26

 

도전: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상황:예수님이 드신 비유, 생베와 낡은 옷과 새포도주와 새부대는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적용되어야할 원리이다.구약과 신약의 분기점, 율법과 복음의 분기점에서 아주 극명하게  차별화되어 나타나게된 원리이다. 죽은 소녀를 살리시고 그 몸에 손만 대어도 고쳐진 혈루증 여인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복음의 시대엔 그 전과 비교하여 아주 혁신적으로 새 부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 승천하신 후 열려진 하나님의 성령의 시대엔 포도주 부대는 역시 혁신적인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 재림의 직전 시대로 보이는 오늘날의 시대엔 하나님께서 그 영을 한량없이 부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되는 기적들이 속출할 것이고 하나님의 양대 속성인 공의와 사랑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일들이 쓰나미처럼 일어날 것이다. 물론 말세지말의 풍조 속에서 사랑과 믿음이 식는 일들이 일반화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편에 달라 붙어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을 엄청 부으실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새 부대를 가져야 할 것인가?오늘날의 대형교회들은 어떤 새 부대를 가져야할까? 또는 수많은 중소교회들은 어때야할까?   

 

변화:새포도주의 역사를 막아서는 헌 부대의 낡은 지도력들이 사라지고 성령과 말씀의 새포도주의 역사가 순기능적으로 흘러가게하는 새 부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새 지도력이 등장하고 부상하게 하소서!

 

-->나 자신이 헌 부대의 지도력은 아닌지 냉철히 살피고 새 부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도력으로 새로와지도록 최선을 다하자!

Posted by 고직한

본문:마8:18-34

 

도전: 예수님의 인기와 파워가 최고조에 달하는 상황, 예수님을 따르려는 한 서기관을 향한 예수님의 급진적인 제자도 요청

 

상황:서기관이라면 당시 파워 행사깨나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서기관이 예수님께 진지하게 예수님이 어디가든지 따르겠다는 고백을 했다면 이것은 예수님께 좋은 챈스가 아니었을까? 요즈음 교회의 교세 확장의 관점에서나 아주 순수한 전도의 관점에서 본다해도 이는 '찾는 이'(seeker)가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든지 구워삶아서 예수님을 믿게 하고 잘 양육과 보호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이런 서기관을 향해 상당히 높은 제자도를 요구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며 안락한 삶에 익숙해졌을 서기관이 감당할 수 없을 예수님 제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요구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서기관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우호적 존재가 된다면 나쁠 것이 없지 않을까? 예수님은 서기관의 관심이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 단지 호기심 또는 불순한 동기의 조사관찰하려는 의도로 보셨던 것일까? 본문에서는 그것을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어떤 동기이든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의 길이 기본적인 의식주 자체가 보장되지 않은 길임을 천명하심으로써 스스로 따를지 말지를 심사숙고하여 결단하게끔 하신 것은 분명하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한지 40년이 되었고 이른바 사역자의 길에 들어선지 35년이 되었다.

과연 나는 예수님의 래디칼디사이플십에 입각하여 삶과 사역을 전개해오고 있는가? 나의 여생을 위한 나의 준비가 일관성있게 그러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의 수많은 교계지도자들의 노망과 같이 세상에서 보상받으려는 추태처럼 될 것인가?

 

변화:나의 싦과 사역의 착지가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더욱 철저히 준비하자

 

-->끝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삶을 성경에서 교회사와 문명사에서 찾아 연구하기 시작하자

 

변화:

Posted by 고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