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4:33-39

 

도전:예수님 안에도 아버지의 원에 반하는 다른 원이 있었다. 그래서 지와 정의 표현은 그 예수님의 원을 따른 것이었으나 의지적 선택은 아버지의 원함 쪽이었다.  이것이 베드로와 다른 점이었다. 

 

상황:예수님의 마음에도 예수님의 원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원함의 두 마음이 존재했다.(36절) 그리고 베드로의 마음에도 두 마음이 존재했다. 베드로의 마음의 원함과 육신의 원함. (38절) 베드로는 육신의 원함에 결국 져서 아주 중요한 순간에도 깨어있지 못하고 잠을 자는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원함과 다른 예수님의  원함에는 죄가 없었다. 예수님의 원함과 아버지의 원함은 분명 달랐지만 예수님의 원함은 그야말로 사고와 정서 작용의 원함이었고 의지적 작용까지는 안갔다. 예수님에게 더 강한 아버지의 원함에 순종하려는 열망과 의지가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 죄인인 인간들, 아무리 거듭났다 하여도 아직 육체에 죄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버지의 원함에 위배되는 어떤 자신의 원함이 사고와 정서 작용에까지 나타났으면 분명 그것은 의지적 작용까지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다. 여기서 예수님의 또 다른 면을 추정하게 된다. 최서형박사의 통전적 생명관에 의하면 인간의 육신은 단지 하드웨워만이 아니라 besouled body로서 소프트웨어가 내장된 하드웨어인 셈이다. 각 오장육부라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가 달려있는데 그 소프트웨워가 죄인이 된 이후 죄성이 가득한 소프트웨어로 코드화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정의적 존재로서 지적, 정서적 차원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면 거의 자동으로 의지적 작용이 일어나서 육신에 코드화되어 있는 방향으로 행동이 나타난다. 또는 베드로처럼 마음에는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육신의 코드화되어 있는 것이 더 강해 그 깨어있어야할 중요한 순간에 자고 있는 것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육신은 분명 일반 죄인의 육신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마리아 안에서 성령으로 일태된 예수님의 육신은 그 오장육부 안에 내장된 소프트웨어에 죄성이 깃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지적,정서적 작용까지는 예수님의 원함이 강했으나 의지적으로 아버지의 원을 붇잡았고 그의 육신은 그 의지적 원을이 행동화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면 유혹과 위기의 순간에, 절대절명의 중요한 순간에 내가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내 뜻과 내 원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한 나의 준비는 무엇이어야 할까?

 

변화:내 안에 하나님의 원함과 나의 원함이 대립될 때, 나는 하나님의 원함을 선택하는 훈련들을 자잘한 영역에서부터 큰 영역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행하고 평가를 해보와야 한다. 그러내 육신 오장육부 속에 코드화되어 있는 것들을 성령화하고 말씀으로 육화하는 inward journey training을 보다 더 열심히 많은 시간을 적극적으로 행해야 한다. 이 훈련이 누적되어 있을 때 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선택은 내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 하나님의 임재 속에 나홀로 있는 시간(solitude)을 가능한대로 최대한 많이 만들자. 그리고 임재적 묵상 및 사도적 기도 등의 inward journey time을 많이 갖자! 아내와 함께 기도하러 아뜰리쉬 다락방에 오늘 저녁도 가자.

Posted by 고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