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3:10-21

 

도전:오늘과 같은 다원주의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란?

 

상황: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할 정도의 대상이 되는 빌립보 교인들 중에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거듭난 듯 해도 그들의 신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아니라 오직 배이다. 이런 자들의 포장술은 뛰어나서 이른바 음식과 관련한 정결법으로 자신들의 진정한 관심사를 포장하지만 오직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율법을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어떤 율법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선 상대화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배에 들어가는 음식의 정결함을 말하는 정결법이라해도. 마치 그 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과 능력에 저해가 된다면 그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바울에 의해 변화받아 형성된 빌립보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오늘날 훨씬 혼탁한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그 실현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느 사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세사리가 되고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도 이루어지는 '공의와 평화'를 추구한 것은 아닌가? 다원주의적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신앙과 세상의 이원론적인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을 하늘나라적인 관점에서 변화시키고자할 때 종종 세상의 프레임에 갇혀서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지경에 빠질 가능성이 상존한다. 존스톳이 말하는대로 배고픈 사람에게는 복음을 들을 귀가 없다. 그러므로 그 귀를 열어주는 빵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빵의 문제가 해결된다해서 복음을 들을 귀가 열리는 것은 아닐 수도 있잖은가? 그리고 귀가 열려도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제공않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닌가? 문제는 빵을 주어도 인간의 문제는 '오직 빵'이라고 믿고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은 필요하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기도 하셨고 병들을 치료도 해주셨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에 대해 눈이 열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그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변화: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된 하나님나라의 프레임 속에서 이 땅의 체인지메이커가 되자!

 

→: 이번 상해 코스타의 첫날 저녁 집회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명히 가르치자. wounded healer이든 change maker이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되고 동력이 되고 목표가 되는 삶을 보여야 한다. 

Posted by 고직한

사랑의교회에서 정감운동(정직과 감사운동)을 시작하던 6년 전부터 이 운동에 공감하는 분들과 초교회적으로 모여 새벽에 기도하는 모임으로 인해 감사한다. 새벽나무라는 이름은 원래 지금 국회의원이 된 김상민형제가 작명한 '새벽에 나라를 위해 무릎꿇는 사람들'이란 기도회에서 차용해온 말이다. 다만 차별화를 위해서 정감새벽나무라 하였다. 이 기도회는 한 달에 두번 수요일 새벽6시반부터 9시까지 모여 기도하는 모임이다. 여기에 꾸준히 참여하는 분들과 좋은 기도의 관계가 생겨 내게 너무도 힘이 된다. 함께 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기도하고 특별히 나라를 생각하며 무를꿇는 그 시간이 내겐 실로 귀하다. 특별히 이 귀한 모임을 희생적으로 섬기시는 이화숙교수님으로 인해 감사드린다. 

Posted by 고직한

빌3:1-9

 

도전:"예수님 외에는 모든 것이 다 배설물이야!"라는 바울의 극단주의

 

상황:살아가는데 유익한 소셜 스테이터스와 스펙들을 바울은 해가 되고 심지어는 배설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바울의 극단주의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런 것들을 덜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나? 또는 2차적인 것들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나? 해가 되는 것이니 배설물이니라고 말하는 것은 좀 극단이 아닌가? 아무리 예수님을 자랑하려해도 이 세상에선 뭐 돈도 좀 있고 학위도 제대로 갖추었고 뭐 좀 '뽀다구'나는 것이 있어야 예수님을 자랑해도 먹히는 것이 아닌가? 찌질이가 되어서 예수님을 자랑하려면 누가 귀를 기울일까? 바울이 말하는 것은 찌질이가 되어야한다는 말인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자랑하기 위해서 바울은 극단주의자가 되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스테이터스와 스펙들을 해가 되는 것으로 또는 배설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심리 속에는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기는 사실상 우상숭배의 심리가 스며있기 때문에 그렇다. 또는  마치 침몰하는 배에선 구명튜브 외엔 다른 짐들이 다 해가 되므로 내어던져야 하듯이

예수님만 신뢰해야하는 상황에서는 소위 유익했던 것들이 나를 해치는 짐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혈육적 관계를 심지어 미워해야한다고 하시는 급진적인 말씀과 맥이 통한다. 예수님을 쫓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삶에는 극단주의와 급진주의가 진리이다. 균형이고 상식이고 하는 것은 다 거짓이다. 

오래 전 문애란대표가 이른바 '영빨'이 충만한 초롱초롱한 눈 빛과 목소리로 "다 똥이에요!"라는 말을 할 때 그 분의 직설적인 표현에 감동과 함께 놀랐었다. 광고계의 신화적이었던 그가, 여성카피라이터 1호니 깐느광고제에서 은상수상자이니하는 찬란한 스펙을 갖고 있는 그가 그 말을 할 때는 마치 그런 것들은 "다 똥이에요!"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 예수님을 알려면 그런 것들은 해가되고 오물과 같으므로 다 치워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에 조금이라도 연연하면 예수님을 향한 내 마음이 흐트러질 뿐이다. 아주 값진 향수는 내 몸에 모든 것들을 씻어내었을 때 그 가치가 발한다. 가장 값진 보석은 그 주변을 심플하게 치워버려야 훨씬 빛난다. 다른 보조수단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문대표의 또 하나의 명 카피, "다 똥이에요!"는 바울과 예수님의 극단주의와 급진주의와 통한다. 이른바 강남 스타일이 아닌 '예수 스타일'이다!

 

변화:바울의 극단주의를 내 가치와 태도로 채택하자.

 

→: 이번 추석 중 섬기게될 상해코스타의 저녁 집회 중 유학생들에게 바로 이 바울의 극단주의를 믿음으로 채택하도록 도전하자.

 

 

Posted by 고직한

그간 그래도 건강하시게 지내오신 83세 노모님이 사고로 인해 고관절 수술을 하시고나서 CT 촬영결과 대장암 말기로 추정되는 진단이 나왔다. 아직 암이라는 사실을 어머니는 모르시지만 극구 내시경검사조차 거부하시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남의 일처럼 여겨진 노인문제가 나에게 닥치는 것을 심각하게 느끼게 된다.  --- 새삼 아내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일을 하는 관계로 간병인을 쓸 수 밖에 없긴 하지만 시모를 지극 정성으로 생각하며 보살피는 아내를 보며 미안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  분명 나는 처복만큼은 엄청나다! 하나님께 큰 감사!

Posted by 고직한

빌2:19-30

 

도전:대부분의 크리스찬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고 자기 일을 구하는 것을 바울은 지적한다.

 

상황:이미 바울의 시대에도 적잖은 크리스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보다는 자기 일을 구하였다. 그러할진대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할까? 사람의 심중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의 심령을 보신다면 뭐라 판정을 내리실까? 바울은 디모데가 바로 자기 일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모델로 말하고 있다. 디모데는 빌립보교회와 뜻을 같이하여 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도 인정하듯이 디모데는 연단을 받았으며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깥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에바브로디도를 언급한다. 바울에 의해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로 불려진 자이었다. 자기가 병들어 죽게된 상황에서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빌립보교회를 염려하였고 수고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어떠한가? 나는 외견상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며 온 자임은 분명하다. 이른바 사역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진정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처럼 포장된 그러나 실상은 '나의 일'을 구하여 온 것은 아닌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나를 비교하면 나는 어떤가?

사실 나는 나름대로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살아오긴 했다. 심지어는 나의 건강과 나의 가정도 희생한 채로. 그러나 그 내면의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나? 부끄럽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가 순도 100%로 나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면 살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내 힘과 의지로써 하려면 뭔가 내 냄새가 나타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변화: 그러나 내가 오직 성령에 의해 움직인다면 나는 성령의 일을 구할 것이다. 전적으로 성령에 사로잡히고 싶다. 그래서 내가 내 일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진정으로 구하며 살고 싶다.

 

→: 아뜰리쉬 다락방에서 아내와 함께 더욱 성령을 사모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좀 더 갖고 빈도수를 더 높이자. 최대한 기도를 중심화하고 다른 일들을 비중심화시키는 노력을 더 기울이자!

Posted by 고직한

어제 모인 '감사컨텐츠 TFT'가 아주 좋았다. 특별히 평소 말이 적던 윤경자매의 솔직한 내면의 갈등 나눔에 우리 모두 공감하였다. 그리고 배종수교수님과 김흥준교수님의 인생의 노련미가 묻어나는 조언들 ! 격주 일회 아주 바쁜 중에 번개불에 콩튀겨 먹듯이 모이는 짧은 모임이지만 평상 시 카톡그룹채팅으로 나누다 모이니 이젠 정이 푸욱 배여가고---

천천히 가는 프로젝트 팀이지만 그 슬로우라이프로 인해 오히려 감사하다. 그러면서 뭔가 내공이 언젠가 분출될 것 같다. 

우리 감사컨텐츠TFT,짱!!

Posted by 고직한

빌2:12-18

 

도전:나의 구원의 확신은 바울이 말하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상황:칭의적 의미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성화적 의미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도상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내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하여서 마치 더 이상 성화될 필요성이 없이 온전함에 도달한 것 같이 확신한다면 이것은 오만이고 근거가 없는 억측(presumption)이다. 온전한 의미의 구원에 이루기 위해서는 두렵고 떨림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겸손할 것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고 어찌하면 온전함에 이를지 하나님 앞에 마치 시험준비하는 자가 불을지말지를 노심초사 걱정하며 준비하는 것같이 하라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기독교의 진리의 패라독스를 본다. 칭의적 의미의 구원에 대해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진대 아주 강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나, 성화적 의미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구원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또는 자신이 도달한 지점에 대해서 끊임없이 불만족스러워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두렵고 떨림의 자세가 나홀로 노력하고 투쟁하는 외로운 싸움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내 안에는 '행하시는 이'(God who works in me)가 계시고 그 분은 내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14절).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흠이 없고 순전하여'질 때까지이다.그것도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그렇게 입증이 되어야하는 것이다(15절). 그럼으로써 나는 패역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16절).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내게 기대하는 성화적 구원이란 온상에서의 나약한 성장이 아니라 비바람 몰아치고 온갖 더위와 추위의 역경이 있는 세상 속에서의 강인한 구원을 말한다. 경쟁이 치열하고 내가 온전함을 추구하면 죽음의 위협이 있는 그런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빛이 되길 원하신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많은 내공이 필요할까?! 

 

변화:나야말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을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더욱 치열하게 살자.

 

→: 성화적 의미의 성장과 구원을 위해 더 많은 내공을 쌓고자 하는 나의 결단이 더 강화될 수 있는 생태계 속에 나를 놓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의 내가 관계하고 있는 소공동체들이다. 이 소공동체에 임하는 자세를 좀 더 새롭게 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그리고 더욱 성실하게 하자.  

Posted by 고직한

나는 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줄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도 이것은 얼마나 유치하고 짧은 생각인지 모른다. 사회적으로도 나는 누군가의 도움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도 내가 속한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와 연결된 지체들로 인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내게 공급되고 있는 유익! 그 가운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이겠는가? 모르고 있는 것이 훨씬 많지 않을까? 그런데 종종 그 관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섭섭한 일들, 기대 밖의 일들, 때론 화나게하는 일들 때문에 그런 관계들을 부정하고 삭제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알게 모르게' 오고가는 유익과 혜택에 비하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 아닐까? 내가 나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을 인해 감사한다. 소중한 관계들로 인해 감사한다. 아니 소소한 관계들 일지라도 감사한다.

Posted by 고직한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도전:항상 기도할 때 특별히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이유는 무엇일까?

 

상황:무시로 기도하라든가, 항상 기도하라든가, 쉬지말고 기도하라든가하는 명령은 기도의 때와 관련한 말씀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할 때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며 기도의 컨텐츠와 관련한 것을 말한다. 많고 많은 기도의 제목들 중 많은 성도들을 기억하며 기도해야할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그 성도들 하나하나를 바로 나를 소중하게 대하듯이 대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나도 필요를 많이 갖고 있고 보호와 가이드를 필요로 한다면 그리고 그런 필요들이 기도 가운데 공급해주길 원하시는 것이라면 다른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리고 성도 하나하나가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 지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지체 간의 상호 기도는 마치 몸 속에 세포마다 연결되어 영양분이 상호 소통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천애인이란 하나님의 대계명에 비추어 하나님께서 성도들 사이에 가장 이루어져야할 '경천'의 열매가 그것이고 '애인'의 구체적인 모습이 서로를 위하여 중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서로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부모가 여러 자녀들이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며 서로를 아끼는 모습을 볼 때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선 우리가 여러 성도들을 윟여 기도하는 모습에 기쁨을 누리시는 것이다.  

 

변화:나와 연결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나와 연결된 지체들이다. 내가 그들과의 지체의을 가장 잘 나타내는 모습은 내가 그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기도하는 것이다. 나의 소중한 관계들 속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기도, 보다 더 열심히 하자.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항상 기도하자.

 

→: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Daphne Roberts선교사가 떠오른다. 위하여 기도하고 연락을 해보자.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새롭게 만들어 보자. 그리고 항상 기도할 때 잊지않고 기도할 수 있는 시스템(아이폰 메모 사용)을 만들도록 하자.

Posted by 고직한

한 달에 한 번 첫째 월요일 오전에 영락교회에서 모여 다음 세대를 위한 어머니중보기도회를 한지 벌써 사년이 되었다. 찰스김과 같이 하던 NEXT WAVE CONVENTION을 하면서 자연스레 시작된 기도모임이 이렇게 지속되고 발전될줄은 몰랐다. 영락교회와 사랑의교회 권사님들이 주축이 되어서 이젠 다른 교회 권사님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이 분들은 교회에서 나름대로 기둥같이 일하시는 분들이다. 이들이 어머니 마음으로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순수하게 중보기도하는 일들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회장으로 섬기시는 윤정자권사님, 하숙란권사님! 이 분들의 어머니 마음이 한국교회 권사님들께로 흘러들어가면 분명 한국교회의 미래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만큼 자녀들을 위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주신 분이 없지 않는가? 그것도 이젠 자기 자식이 아니라 순수하게 남의 자식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어머니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어찌 외면하실까?

Posted by 고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