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4:33-39

 

도전:예수님 안에도 아버지의 원에 반하는 다른 원이 있었다. 그래서 지와 정의 표현은 그 예수님의 원을 따른 것이었으나 의지적 선택은 아버지의 원함 쪽이었다.  이것이 베드로와 다른 점이었다. 

 

상황:예수님의 마음에도 예수님의 원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원함의 두 마음이 존재했다.(36절) 그리고 베드로의 마음에도 두 마음이 존재했다. 베드로의 마음의 원함과 육신의 원함. (38절) 베드로는 육신의 원함에 결국 져서 아주 중요한 순간에도 깨어있지 못하고 잠을 자는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원함과 다른 예수님의  원함에는 죄가 없었다. 예수님의 원함과 아버지의 원함은 분명 달랐지만 예수님의 원함은 그야말로 사고와 정서 작용의 원함이었고 의지적 작용까지는 안갔다. 예수님에게 더 강한 아버지의 원함에 순종하려는 열망과 의지가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 죄인인 인간들, 아무리 거듭났다 하여도 아직 육체에 죄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버지의 원함에 위배되는 어떤 자신의 원함이 사고와 정서 작용에까지 나타났으면 분명 그것은 의지적 작용까지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다. 여기서 예수님의 또 다른 면을 추정하게 된다. 최서형박사의 통전적 생명관에 의하면 인간의 육신은 단지 하드웨워만이 아니라 besouled body로서 소프트웨어가 내장된 하드웨어인 셈이다. 각 오장육부라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가 달려있는데 그 소프트웨워가 죄인이 된 이후 죄성이 가득한 소프트웨어로 코드화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정의적 존재로서 지적, 정서적 차원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면 거의 자동으로 의지적 작용이 일어나서 육신에 코드화되어 있는 방향으로 행동이 나타난다. 또는 베드로처럼 마음에는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육신의 코드화되어 있는 것이 더 강해 그 깨어있어야할 중요한 순간에 자고 있는 것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육신은 분명 일반 죄인의 육신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마리아 안에서 성령으로 일태된 예수님의 육신은 그 오장육부 안에 내장된 소프트웨어에 죄성이 깃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지적,정서적 작용까지는 예수님의 원함이 강했으나 의지적으로 아버지의 원을 붇잡았고 그의 육신은 그 의지적 원을이 행동화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면 유혹과 위기의 순간에, 절대절명의 중요한 순간에 내가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내 뜻과 내 원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한 나의 준비는 무엇이어야 할까?

 

변화:내 안에 하나님의 원함과 나의 원함이 대립될 때, 나는 하나님의 원함을 선택하는 훈련들을 자잘한 영역에서부터 큰 영역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행하고 평가를 해보와야 한다. 그러내 육신 오장육부 속에 코드화되어 있는 것들을 성령화하고 말씀으로 육화하는 inward journey training을 보다 더 열심히 많은 시간을 적극적으로 행해야 한다. 이 훈련이 누적되어 있을 때 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선택은 내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 하나님의 임재 속에 나홀로 있는 시간(solitude)을 가능한대로 최대한 많이 만들자. 그리고 임재적 묵상 및 사도적 기도 등의 inward journey time을 많이 갖자! 아내와 함께 기도하러 아뜰리쉬 다락방에 오늘 저녁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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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5:22-33

 

도전:서바나 선교를 위한 바울의 fund raising 전략의 핵심은 friend raising과 prayer raising이다.

 

상황: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골은 서바나 선교이었다. 그러면서 바울은 가는 길에 예루살렘을 거처 로마로 간다. 로마에 가서 로마교회가 자신의 서바나 선교비전에 공감하고 파송해주길 바라면서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로마교회에 불후의 명저가 될 '로마서'라는 대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나눠주고자 간다고 하였고, 그들과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누리고 기쁨을 나누고자  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함께 기도하고 기도를 부탁한다. 그리고 마게도냐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것을 하나의 롤모델 케이스로 알려주었다. 이 때 자연스레 영적인 것들을 얻게된 자들이 이타적인 사랑으로 육적인 것들을 나누는 것의 필요성을 교육하였다. 나는 다시 한번 순수하고 진정한 성경적 코이노니아의 가치를 발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의 삶과 사역의 동기는 누가봐도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30절)이었다.  

나와 같은 오랜 사역자들의 문제는 mission이 너무 앞서는 것이다. 코이노니아가 충분치 않으면서도 미션을 강조한다. 코이노니아 없는 미션은 일종의 비지네스이다. 미션을 위한 펀드레이징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물질을 기꺼히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펀드레이징의 기초는 friend raising이다. 그리고 friend raising의 기본과 동력은 prayer raising이다.

 

변화:근래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여러 축복된 관계들을 맺으며  보다 더 순수한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을 깊이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한다.

 

→: 안용운목사님처럼 핸드폰 문자로 좀 더 깊이 지인들과 삶과 사역을 코이노니아 차원에서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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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5:14-21

 

도전:바울의 이방인복음화의 사명에 대한  실천적 사역과 그 특징:복음주의전 전도+에큐메니칼적 행위+power evangelism 

 

상황:바울은 이방인 복음화를 위한 비전과 미션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비전과 미션의 삶을 그대로 살았다. 그 삶의 특징은 말뿐만 아니라 행위+표적+기사의 능력+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런 비전과 미션은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에 이르기까지 실천적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나의 지금까지의 약 40년에 걸친 젊은이복음화 사역을 돌아 보면 무엇이 문제이고 결핍이었는지가 드러난다. 나는 복음을 말로 표현할 뿐 아니라 행위로써 복음을 나타내는 삶을 살았는가? 거기에 덧붙여 표적과 기사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는가? 한국의 전형적 복음주의적 삶과 사역패턴은 분명 한계가 있다.  나 역시 그 한계 속에 오래동안 갇혀 있었다. 그 결과 복음을 행위로써 나타내는 삶에 분명 실천이 약했다. 이 점에 있어 그 신학적 모순과 혼돈을 차치하고 에큐메니칼 진영의 강조점인 윤리적 행위와 실천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그리고 이른바 power evangelism의 면모가 나의 사역엔 잘 나타나지 않았었다.  복음주의 전도와 선교는 사도적 전도와 선교를 더욱 가깝게 배워야  하고 닮아야 한다.이럼 점에서  근래에 내가 관심갖고 배우고 있는 두나미스 사역이 두가지 면에서  보완이 되는 것을 확실히 느낀다.

 

변화:예수원의 벤토리신부님 및 커뮤니티 오브 크로스의 브래드롱 목사가 개발한 '대천덕신부님'의  두나미스 사역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 및 배움과 실천의 기회를 만들자.

 

  →: 두나미스사역과 관련하여 어제 두나미스 사역을 위한 컨텐츠 개발을 하고 있는 최인선전도사와 함께 나눈 얘기를 진지하게, 전향적으로 검토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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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5:1-13

 

도전:하나님의 '이상 사회'는 약자의 약점을 강자가 담당해주고 선민과 이방인들이 다 주 안에서 하나되어 주를 한마음으로 찬양하는 일이 일어나는 공동체이다.

 

상황:하나님의 '이상 사회'가 구속사의 정점의 모습이다. 이른바 하나님의 나라가 곧 하나님의 이상사회이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유약하거나 불완전한 자가 아니시니 하나님께서 이상적으로 생각하시는 인간 사회의 모습이 있다면 그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에는 약한 자의 약점을 강한 자가 담당해주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GREAT COMMANDMENT인 경천애인의 '애인'(이웃사랑)의 구현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이웃사랑의 근거는 '경천'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음(3절)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 속에는 주의 백성들과 열방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되어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일이 아주 중요한 목표이다. 사실상 그 주의 백성들과 열방들이 하나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한 예로 한국과 일본의 적대적 관계가 해결되는 것을 넘어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되는 것이 실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과연 가능할지?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이 그렇다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의 아주 극명한 모습을 본다. 그것은 그야말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아주 이질적인 것, 대립적인 것, 상호 반목하는 것을 극복하고 녹여내는 사랑이다. 이 사랑을 알고 실천하길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하신다. 그러나 어떠한가? 우리 공동체는 강자가 약자를 담당해줄 사랑이 부재하고 우리의 선교는 이 사랑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선교한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의 결핍과 부재, 심지어 원수처럼 여기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나는 어떻고 나에게 가장 요청되는 변화는 무엇인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이 '사랑'이다. 내가 이 사랑없이 하는 모든 사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못된다.

 

변화:모든 내 사역과 삶의 기초와 동력과 목표가 사랑이 되게 하자. 그 사랑은 약자의 약점을 담당해주는 공동체와 관계의 빌딩이다.

 

 →: 목요 체인지매이커플랫폼의 청년멘티들에게 이 사랑을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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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4:13-23

 

도전:하나님의 나라-->(믿음으로)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과 사람에게 칭찬을 받음

 

상황: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섬기는 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자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자이다. 이런 내공이 있고 그 외적 결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삶 즉 경천애인적 특징이 나타나는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초대교회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행2:41-47에 보듯이 성령세례를 받아 이들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려 물질까지 서로 통용하는 코이노니아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이들의 모습을 보고 칭찬하였다.  이렇게 함에 있어 믿음이 중요한 통로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가? 나는 지금 일반 목회자들과는 달리 이른바 수평적인 목회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시공간적으로 나는 한 교회를 목회하는 타입의 사역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려운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근래 5-6년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기독 전문인들과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삶과 사역을 허락하셨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의 목회적 필요를 보게되었고 대가없이 그들을 향해 이른바 수평적인 목회를 느슨한 차원에서 해오게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젠 좀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섬겨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특별히 그들을 통해 전개될 다음 세대를 위한 멘토링을 꿈꾸면서. 그런데 이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나야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나라의 본질적인 특징 곧 성령 안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그 코이노니아의 본질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로부터 경천애인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와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사람들의 삶도 경천애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변화:하나님 나라 백성의 본질 또는 내공(성령 안의의,평강,희락)과 열매(하나님을 기쁘시게함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삶)가 내 삶과 사역의 특징이 되게 하자.

 

 →: 방금 출발한 목요 체인지매이커플랫폼의 청년멘티 15명을 위한 사역에 있어 이 하나님나라의 본질과 열매가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게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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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4:1-12

 

도전:하나님은 우리 삶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의 판단을 존중해주시는 중간지대의 삶을 허락하셨다.

 

상황:아디아포라(adiaphora)는 성경에 금하거나 명령하지 않는 교회의 의식적인 행사를 신자의 개인 신앙 양심에 맡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아닌 '아무래도 좋은 일들' 곧 아디아포라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디아포라를 인정 않고 아무래도 좋은 일들을 갖고 논쟁적으로 몰고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신다. 내가 선택한 것에 내가 책임을 지게끔 해주셨다. 그러면서도 내가 믿고 실천해야할 아주 중요한 일들도 내 자유의지를 존중해서 내가 판단하고 내가 책임지면 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명료하게 가르쳐주신 것들 말고 '아무래도 좋은 일들' 곧 아디아포라의 영역에 속하는 이슈들을 허락하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으로서 행동하는것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하는 관용적 자세이다. 물론 무엇이 성경의 근본적이고 무엇이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이냐는 약간 다를 수 있다. 나는 사도신경적 고백의 내용들이 근본적인 것들이라 본다. 사실상 그 외의 가르침들은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점에 있어 오늘의 말씀은 아주 명쾌하다. 무엇을 하든 주의 영광을 위해!

 

변화:초대교부와 존스톳이 말한 것처럼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에서는 일치를 비근본적인 것들에 있어서는 또는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들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인정하되 모든 것을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자.   

(아디아포라 가르침이 한국교회, 특히 근본주의적인 성향의 교회들에 필요하다. 반면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을 비근본주의 경향의 교회들은 명심해야 한다.)

 

→: 아디아포라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Posted by 고직한


롬13:8-14

 

도전: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근거는 재림을 의식하고 우리가 처한 시기가 자다가 깰 때임을 아는 분별력에 있다.

 

상황:사실 하나님은 당시의 크리스찬들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거의 불가능한 한 말들만 하라고 골라서 하시는 것 같다. 솔직히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어떻게 사랑하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만약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내가 거듭난 것이 아니라면 엉토당토 않는 얘기다. 그러나 이른바 구원받아 내가 빛의 갑옷을 입은 것이 사실일진대, 내가 내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구원이 최종적 완성이 아니다. 칭의를 넘어서 성화와 영화의 구원이 더 있다. 그러니 칭의적 구원 이후의 삶이 구원의 완성이란 면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할 근거는 무엇이며 그 공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명시적으로 바울이 재림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바울은 시기를 언급하며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다하며 분명히 재림을 암시하는 말을 하고 있다. 사실상 임박한 재림에의 의식없이 구원 이후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른바 구원의 확신이라는 가르침이 내 정체성의 의식을 강화시켜주는 것은 아주 좋다. 그러나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면이 분명히 있다. 이에 찬 물을 퍼붓고 자다가 깰 때라고 말할 수 있는 '강박적 긴장감' 없이는 사실상 그 느슨한 삶을 벗어버릴 길이 없다. 나는 이 점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정말 믿는가? 그것도 긴박한 재림을 믿는가? 마치 반드시 다가 올 학기말 고사처럼 나는 느끼며 평소 준비하는가?

 

변화:나에겐 새벽 잠을 깨워줄 강력한 얼람클락이 필요하듯 임박한 재림에 대한 '강박적' 신앙이 반드시 필요하다. 구언 이후의 삶을 보다 더 완성해 가기 위해.

 

→: 재림과 종말론에 관한 성경연구를 하여 성경적인 종말의식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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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3:1-7

 

도전:불편한 명령-진노 때문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상황: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언론사의 기자와 논설위원 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거의 가정을 모르고 사셨고 마침내 정치하시다가 사상범으로(혁신계라는 낙인이 찍혀) 감옥에 가셨다. 무려 5년 정도 계셨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엔 조용한 곳에서 글쓰시고 사업하시느랴 역시 집을 돌보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나는 고등학교 들어가기까지 아버지가 살아 계셔도 사실상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살아 온 것이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부턴 어떤 일의 계기로 아버지와 아주 가깝게 보내는 기간이 적어도 내가 결혼하기까지는 이어졌지만.

그러다보니 난 윗 권위와 상대하는 법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내온 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갈등은 특별히 윗사람 남자들하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 나는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해서 뭔가 저항감이 있었고 반골적 기질이 작동했다. 이런 나에게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것은 사실상 꼴통이 되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인생 살아보면 역시 '상사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이 있다.그러나 이런 기술적 차원 보다는 양심에 입각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니 정말 마음이 불편해진다.

 

변화:내 마음에 불편이 있어도 위에 있는 권위를 존경하고  복종하자. 물론 하나님나라의 관점과 가치 속에서 짠 맛 잃은 소금처럼 순증주의자가 되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개혁적 변혁적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윗 권위를 존경하고 복종하는 자가 되자.

 

→: 윗 권위에 대한 신앙적이고 양심적인 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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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2:14-21

 

도전: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의 근거와 동력이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진노

       하심에 맡기는 것으로 가능하고 충분한가?

 

상황:과연 하나님께서 내가 직접 한풀이를 하는 것보다 더 시원하게 더 완벽하게 한풀이를 해주실까? 솔직히 미덥지않다. 하나님의 나 대신 원수 갚는 것을 믿어도 되며 그렇기 때문에 나의 정당한 원수 갚기를 무작정위탁해도 될 것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내가 죄성으로 더 오바하여 한풀이를 할까봐 운동 경기의 심판관처럼 하실 필요성이 있는 것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원수 갚는 것 자체를 맡기라고 하시면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자, 봐라! 내가 너 대신 원수 갚는 것이 이만큼 완벽하하지 않아?"라고 하실 수 있는 것을 보여주셔야하지 않는가? 아직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또 나의 개인사에 있어 하나님의 공정하게 대신 원수 갚기에 대해서 의혹과 의구심이 많이 생기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컨대 똑같이 독재자이었으나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죄과는 박정희의 죄과보단 훨씬 크고, 문명사적인 기여에 있어 누구나 인정하듯이 박정희의 공적이 더 훌륭했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왜 김일성,김정일의 죽음은 그렇게 평탄한 죽음이고 박정희는 그렇게 끔찍한 말로를 맞았나? 그래, 그의 독재와 그로 인한 수많은 피해자들의 인권 착취와 억울한 죽음 등을 볼 때 박정희는 그렇게 죽어 싸다고 말하자. 그런데 6.25 등을 일으켰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기아로 수용소에서 죽게한 김일성,김정일은 어떻게 그렇게 곱게 죽어야 하나? 아--헷갈린다!  이런 면에서 사도바울의 가르침은 무엇이고 그 말씀 붙잡고 아주 억울하게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의 모습은 무엇인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일단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여기서 시편73편의 저자와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떠오른다.

                   시73편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마음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마음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육체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하박국2장

7.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8.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박국3장

12.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
13.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14.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15.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변화:시73편 저자가 '주의 성소에 나아가 ' 알게되었듯이 내가그저 불평하고 투덜거리지 말고 하나님의 전에 이 문제의식을 갖고 직접 나아가 하나님의 응답을 듣자. 시편저자는 그 악행하는 자들의 행위가 마치 꿈 속에 일처럼 깨고나면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듯이 그럴 것이라고 한다.분명히 내게 요청되는 것은 주님 자신과 더 친밀해져서 주님의 속 생각을 더 잘 알게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요 이슈를 하나님의 자신의 관점과 영원의 관점 및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는 통세적 관점에서 보고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하박국처럼 고백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박국3장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 오장육부가 흔들리고 뼈가 썩는 역사의식 속에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양극성 신앙을 갖자!

Posted by 고직한




티는 하나님과의 데이트다. 큐티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라고 할 때 큐티를 데이트에 비유하는 것은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오늘은 하나님과 데이트하고 싶지 않은데라는 느낌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말은 요즈음 큐티 본문이 별로 와 닿지 않아. 이런 드라이한 본문으로 꼭 큐티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문제제기는 상당히 많이 있다.


친구 이전에 주인이시다

큐티를 하나님과의 데이트로 규정하는 것은 틀린 게 아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관계를 신랑신부의 관계로 보는 것은 아주 성경적이다. 이 사랑의 관계 속에 데이트가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친구 관계로 초대되었다는 것 또한 아주 성경적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 여겨졌다(2:23, 41:8). 모세는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다(34:10).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초청하셨다(15:15).

그러나 이 큐티론의 최대 문제점은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를 수평적 차원에만 국한시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먼저 확립되어야 할 수직적 관계의 요소가 결여된 것이다. 수직적 관계에 대한 기본자세가 전제되지 않는 수평성은 우리의 경건생활의 모든 시도를 종종 인본주의적 오류와 실용주의적인 함정에 빠뜨리곤 한다. 그래서 기도도 큐티도 내가 싫으면 그만일 수 있는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데 데이트를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요즘 같이 수평주의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이 말에 저항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곧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과 왕권(Kingship)과 머리되심(Headship)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의 모든 주권과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부인(self-denial)을 해야 하며, 종됨(servanhood)의 자세를 철저히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말해주는 에스겔 1:10(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과 이와 상응하는 요한계시록 4:7(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을 보면 우리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과 소(송아지)의 이미지도 있으나 무서움과 두려움을 주는 사자와 독수리의 이미지도 있다. 우리가 큐티를 할 때엔 하나님의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떠올려야지 편식하듯이 자신에게 필요한 이미지만 떠올려서는 안 된다.


교제 이전에 알현부터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평적인 교제 이전에 수직적인 충성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귐의 장으로 수평적인 초대장을 보내시기 전에 우리에게 왕으로서 수직적인 소환장을 보내신다. 우리에게 수평적인 데이트 이전에 수직적인 알현을 요청하시는 것이다. 충성심으로 왕께 알현하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큐티를 하느냐 안 하느냐는 나의 내적 상태와 무관하게 마땅히 표현해야 할 나의 경외감과 충성과 순종의 반응인 것이다. 하나님을 연인으로 여기는 마음도 필요하겠으나 먼저 하나님을 알현해 그의 얼굴빛을 구하는 자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빛을 보는 것 자체가 영광이고 특권이다. 그 빛을 보면 누구든 자신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죄덩어리인지를 느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절실해진다. 이어서 죄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경험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긍휼에 대한 감동이 일어난다. 비로소 하나님과의 데이트가 내 위치와 맞지 않는, 얼마나 파격적인 초대였는지 느끼며 하나님과 친밀감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큐티의 바른 순서다. 하나님과의 데이트 이전에 하나님께 알현함이 먼저요 대전제임을 반드시 기억하라.


고직한 선교사

Young2080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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